외치리

외치리 백야(白野)

500여 년 전에 장(張)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그 후 진주정씨 충장공 화(璜)의 후손 함일(咸一)의 아들 정경득(鄭慶得)이 1500년대 말경에 본면 월악리에서 옮겨 왔는데 현재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으며 군내에서 진주정씨 집단마을로는 으뜸이다. 원래 마을 형국이 반월체(半月 )라 해서 달이 뜨니 밝다는 뜻에서 흰백(白)자와 밤야(夜)자를 써서 "백야(白夜)"라 했다는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동촌, 남촌, 상촌, 중촌으로 되어 있고 지금도 일부는 그렇게 부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백야(白也)로 표기했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백야(白野)로 썼으며 "온배미"라고 흔히들 부르고 있다. 마을 주위에 있는 외치제(外峙堤)는 "남생이방죽"이라고 하는데 남생이가 많이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장작매, 도롱굴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그중 장작매는 장자가 살았다 해서 부르게 된 지명이다.

외치리 외치(外峙)

외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백제 때부터라고 전하며 처음에 이 마을을 이룬 성씨는 봉(奉)씨였고 그 뒤 오(吳)씨들이 자가일성을 이루고 살았다고 하나 현재 그의 후손들은 단 1호도 없고 1600년대 말경 진주정씨 정수증(鄭遂曾)이 본면 월악리에서 옮겨와 정착했다. 그의 후손들이 주종을 이루며 살고 있다. 현존 성씨 중에서는 진주정씨 다음으로 함평이씨가 250년 전에 여양진씨가 35년 전에 입촌했다. 1983년 5월 적벽돌 제조업체인 광일연와 공업사가 이 마을에 들어섬으로 해서 30여 가구가 이주해 왔다. 처음에는 마을형국이 꿩 5마리가 앉아있는 것 같다 해서 오치(五雉)라 했었다 하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외치(外峙)로 표기돼 있다. 이 마을은 광주직할시와 인접한 마을로 면내 자연마을 중 유일하게 재(峙)를 넘어야만 가게 되는데 재(峙)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외치(外峙)라 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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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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