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리

정산리 내정(內亭)

1600년대 초경에 전주리씨 정종(定宗)의 현손인 화림부수(花林副守)가 임진란 때 출전하여 전사하고 미망인 백천조씨가 아들 인, 의 형제를 데리고 와 정착하였는데 현재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 북쪽에 있는 바우등은 고인돌이며, 예덕리 만가촌 고분군과는 1km 거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 일대는 마한 때부터 농경 집단이 정착했을 것으로 보이는 유적지이다. 마을 앞에 정자나무가 많다 하여 마을 이름을 "내정자(內亭子 1789호구 총수 지명)"라 하였다 하는데 지금은 경지정리 사업으로 인해 정자나무가 거의 없어지고 몇 그루만 남아 있다.

정산리 화산(花山)

전주이씨 이상인(李象寅)은 이이원(李以遠)의 4남으로 인근 내정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장흥임씨의 딸과 결혼하여 분가하면서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았다. 그때가 1880년경이며 전주이씨 다음으로 나주오씨가 1800년대 말경 입촌했다. 예전에는 마을 지형이 한 쌍의 누에머리형국이라 하여 "잠두( 頭)"라고 했었으나 이 마을이 칠봉산의 한 자락이 뻗어 내려온 곳에 형성된 마을이고 칠봉산의 그 자락을 진등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진등은 칡넝쿨 형국이며 이 마을은 칡넝쿨에 핀 칡꽃(葛花)에 해당되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화산(花山)"으로 해야 된다는 어느 지관의 말에 따라 그렇게 부르게 됐다 한다.

정산리 신기(新基)

이 마을은 영광 장성, 함평 어디에 보아도 사방칠봉이라는 내용맥(來龍脈) 하단에 위치한 마을로서 1789년에 발행한 호구총수 책자에 신기(新基) 마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200년 전에도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1800년대 초경 함평이씨 이진택(李鎭宅)이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 두동 마을에서 살다가 처(밀양박씨)와 함께 입촌하였으며 차남 유순(孺淳)이 진사벼슬을 한다. 그 후 120년 전에 정산리 내정 마을에서 동래정씨 1호,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에서 청송심씨 2호,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에서 여양진씨 1호, 정산리 내정 마을에서 전주이씨 1호가 각각 들어 왔으며 일제 때는 일본의 북천(北川), 평목(平木) 성을 가진 자들이 들어왔다가 해방 후 떠났고 영광군 불갑면 순용리 용매 마을에서 불갑저수지 건설로 1920년경에 고흥유씨 1호가 이주해오자 계속 7, 8호가 들어 왔으며 1922년경에 인동장씨가 월계리 덕산 마을에서 옮겨 왔다. 이어서 여양진씨 2, 3호가 들어오고 연안김씨가 1938년에 영광군 백수면 장산리에서 옮겨 왔으며 밀양박씨, 한양조씨, 김해김씨, 영성정씨도 각각 1호씩 살고 있다. 새터라는 뜻으로 신기(新基)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음을 알 수 있으며 120여 년 전 여러 성씨들이 입촌하여 마을 규모를 갖추게 되면서부터 마을 중 상촌에 좌청룡으로 쉬나무를 심었고 하촌(산정동)과의 사이에 우백호로 석비를 세움과 동시에 정자나무와 백일홍나무를 심고 그 옆에 동각(洞閣)도 지었으나 8·15해방 후 없어지고 쉬나무와 석비만 남아 있다.

정산리 동촌(東村)

이 마을은 언제 어느 성씨가 터를 잡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다만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 중에서는 1700년경에 광산군 하남에서 현풍곽씨 곽희수(郭禧守)가 처음 입촌하여 정착했으며 그 후 김해김씨가 1800년대 중순경 들어 왔다. 원래 이 마을의 서쪽에 서촌(西村 1789년 호구 총수 지명) 마을이 있어서 "동촌(東村)"이라 했다. 그리고 마을 뒤에 절의 강당(講堂)이 있던 곳이라 해서 강당밭이라 부르는 지명이 있는데 그곳에서 사용하던 북이 현재 영광군 불갑사( 甲寺)의 북이라고 전해온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정산리 장교(長橋)

전 대야면장을 지낸 함평이씨 이계송(李啓宋)이 인근 정산리 서촌 마을에서 살다가 1920년경 이 마을로 옮겨와 처음 터를 잡았으며 그 후 죽산안씨, 동래정씨 등이 입촌하여 방앗간, 한약방 등을 운영하였다. 이 마을은 장성 방면에서 문장(文場)으로 통하는 도로(국도 24호)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월야면 상구 일원의 교통 및 상업의 중심지로서 6·25사변 이후 연차적으로 조성된 마을이다. 1960년대 초경에 동촌마을에서 자연마을으로 분리되면서 돌로 된 긴 다리가 이 마을에 있었다 해서 "장교(長橋)"라 했으며 흔히들 진다리라 부르기도 하는데 옛부터 이곳이 달(月)이 진 형국이라 해서 "진달"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이 마을 동편에 동촌마을과 신기마을을 넘어 다니는 재를 월령재(月嶺峙)라 하며 달이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인바 진달이 진다리로 변하여 부르게 됐지 않았나 여겨진다.

정산리 서촌(西村)

진주정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하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으며 그 후 1700년대 초경 함평이씨 이경익(李慶益)이 나산면 우치리에서 이거하여 정착했으며 타 성씨가 있긴 하나 자작일촌하고 있는 셈이다. 마을 형국이 서반월(西半月), 즉 서쪽에 떠 있는 반달 같다 해서 "서촌(西村)"이라 했으며 소쿠리형으로 아담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정산리 고실(古實)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전하는 바 없어 알 수 없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성씨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였으므로 오합촌이 되고 있으며 현존 성씨 중에서는 진주정씨가 맨 먼저 입촌했는데 정수송(鄭秀松)이 해보면 금덕리 고두 마을에서 50년 전에 옮겨 왔으며 그 후 상산김씨, 광산김씨, 함평이씨, 금성나씨, 전주이씨 순으로 입촌했다. 원래는 마을 형국이 북치고 비파를 탄다 해서 고(鼓)자와 실(瑟, 슬)자를 따서 고실(鼓瑟)이라 불렀었다는데 원뜻과 다른 "고실(古實)"로 표기되었다. 월야면에 폐합되기 전에는 대야면 고신리(古申里)였으며 1911년(明治 44년)도 대야면 2기 호세장부를 보면 3호가 거주한 기록이 있다.

정산리 영가(永加)

마을이 언제 형성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수령이 300년 이상 된 정자나무(감나무)가 있었는데 고목이 되자 15년 전에 파버렸기 때문에 마을 형성 시기는 300년 전쯤 되었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추측하고 있다. 현존 성씨 중에서는 밀양박씨가 맨 먼저 입촌했는데 70년 전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서 박일용(朴一容)이 옮겨 왔으며 밀양박씨 다음으로 평택임씨, 나주나씨, 함평이씨, 전주이씨, 해주정씨, 죽산안씨, 전의이씨, 제주양씨, 광산김씨가 차례로 입촌해 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풍수지리설에 옥녀포금(玉女포琴)의 명당이 있는데 이 마을은 노래 부르고 있는 형국이라 해서 "영가(詠歌)"라 했는데 일제 때 쓰기 쉽게 하기 위해 원뜻과 다른 "영가(永加)"로 표기했으며 1914년 월야면이 신설되기 전에는 해보면 문암리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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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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