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리

양정리 양지(陽地)

이 마을 역시 마(馬)씨가 번창히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부자로 살았기에 99칸 집이 있었다 한다. 그 후 입향한 성씨는 나주정씨인데 정지아(鄭之雅)가 아버지 훈(薰)이 단종 복위에 연루되 화를 입게 되자 각처로 분산될 때 호남 경차관(敬差官)의 신분으로 서울 남산 밑 입정방(笠井坊)의 터를 버리고 1460년(세조 6년) 양정리 석화산 아래에 은거 정착했다. 그 후 귀양이 풀린 후도 말년을 함평에서 보냈다 한다. 그리고 1680년경에 천안전씨 이제(以悌)가 현 나주군 문평면 산호리 남산 마을에서 옮겨와 정착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다. 마을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햇볕이 잘다는 쪽은 양지(陽地), 햇볕이 들지 않는 쪽은 음지(陰地)라 하였으나 지금은 이를 합쳐 양지(陽地)마을이라 한다.

양정리 방축(方丑)

삼한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고 현존 성씨 중에서는 전주이씨가 200여 년 전에 맨 먼저 입촌했으며 그 후 남방양씨가 150년 전에, 충주지씨가 140년 전에 옮겨와 정착했다. 현재는 14성씨가 살고 있다. 조선조 말까지는 갈동면 "갈월(葛月)"이라 했으며 현재는 "방축(方丑, 1912년 지명)"으로 쓰고 있는데 처음에는 "방축(芳築)"으로 썼다. 마을 이름에 대한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앞에 방축제(方丑堤 : 1945년 설치)가 있는데 예전에는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큰 방축(방죽의 원말)이 있었다 하며 방축이 있으므로 해서 현재의 지명이 됐지 않았나 생각된다.

양정리 기전(基田)

나주정씨 정지아(鄭之雅)의 후손인 정운영(鄭雲榮)이 1800년대 초 경에 양정리 양지마을에서 이 마을로 이주해왔으며 그의 아들 열(說)은 천석군 부자로 이름이 났다 한다. 마을 내의 지명 중 "노루목"이라 부르는 곳에 1호가 거주하고 있는데 마을이 번창할 때는 20여 호가 거주하던 때도 있었다 한다. 마을 지형이 곡식을 까부르는 그릇인 키같이 생겼다 해서 키 기(箕)자를 써서 기전(箕田)이라 했으며 일제 때 기전(基田)으로 바꿨는데 그 연유는 箕자를 계속 사용할 경우 쑥대밭이 된다 해서 고쳤다. 이 마을 뒤에 "노루목"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 바 200년 전 호구총수 책자에 장항(獐項)이라는 기록이 있다. 즉 노루의 목같이 생겼다 해서 노루 장(獐), 목 항(項)을 썼으며 노루가 꼬리를 돌아보고 있다 하여 장고미(獐顧尾)라 불리는 지명이 인근에 있으며 흔히 장귀미라 부르고 있다.

양정리 고정(古亭)

1700년경에는 마을이 없이 정자 한 채가 지어져 휴양처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고정자리(高亭子里)가 보임으로 야산을 일구어 농토로 하려는 농경 정착자가 마을을 이미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 성씨 중에서는 나주정씨가 맨 먼저 입촌했는데 항일 의병활동을 했던 정헌면(鄭憲冕, 1846~1921)이 이 마을 태생이다. 함평이씨가 1906년에, 나주임씨는 1949년에, 선산김씨는 1955년에 들어와 살고 있다. 1912년 지명에는 고정(古丁)으로 표기되어 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옛 정자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고정(古亭)"으로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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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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