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리

월악리 지변(池邊)

동래정씨 정운길(鄭雲吉, 의금부도사)은 임진란 때 상주에 살면서 정기룡(鄭起龍) 장군과 합세하여 상주성을 지키기 위해 지략을 다했는데 1595년경 외가가 있는 내동 마을에 와 살다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영광의 우치(현 장성군 삼서면 우치리)에 왜적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 청장년들을 모아 진군하여 싸우다 아들 돈(燉)과 함께 전사하였다. 손자 재흥(再興)은 왜적에게 붙들려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7년만인 1604년에 귀국하여 현 지변마을에 터를 잡았으며 동래정씨 세거지로써 자작일촌하고 있다. 예전에 마을 앞에는 깊고 넓은 남생이 연못이 있었고 연못 주변에는 정자나무가 자라고 있어 마을을 형성하는데 적격인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다고 하며 연못가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지변(池邊, 못갓)"이라 했다 한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엄청난 화를 막기 위하여 월악산이 스스로 무너져 연못은 매몰되었고 정자나무도 연못과 함께 매몰되었으나 1그루(느티나무)가 존속되어 노거수로 지정되어 있다. 연못이 매몰되면서도 마을에 화가 없었던 마을이라 명촌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연못이 매몰된 주변 들을 "강변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월악리 내동(內洞)

이 마을은 고려 때 충의사인 함평노씨 신(愼 咸豊君)이 고려의 멸망을 한탄하며 은거하던 곳으로 그가 매월 초하룻날이면 산에 올라가 멀리 북쪽의 송도를 바라보며 곡배하고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이 이 산을 월망악(月望岳) 또는 월악(현재의 지명)이라 불렀다 한다. 함평노씨 다음으로는 진주정씨 충장공 황파(忠莊公 璜派)가 군내에서 첫 입향한 곳으로 황의 아들 함도(咸道)가 함평노씨 신의 아들인 유안(有顔)의 사위가 되어 내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함도는 1353년(고려 공민왕 2년) 송도(현 개성)에서 태어나 1421년(세종 3년) 월악리 내동에서 타계했는데 그가 1400년에 함종현령을 역임했으며 관직을 그만두고 내동에 입촌한 것은 1405년경이 된다. 그러나 마을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인돌이 분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래기 12동네 중앙에 있어 "안동네(내동 內洞)"로 부르게 되었다. 내동, 지변, 순촌, 송계, 괴정, 연당, 죽산, 봉덕, 전하, 금석, 백야, 외치를 다래기 12동네라 부르며 이 지역은 옛 월악면 관할구역으로 월악(月岳)을 달월(月)자의 색음을 따서 "달악(다래기)"이라 불렀다.

월악리 성주(城州)

진주정씨 정의원(鄭義源)이 1800년대 중순경 인근 내동마을에서 옮겨와 처음 터를 잡았다. 원래 이 마을은 내동마을에 속해 있었으나 1980년에 자연마을으로 분리되면서부터 마을 이름을 "성주(城州)"라 부르게 됐는데 성주라 한 것은 마을 동쪽 500여 m 쯤에 월악산이 있는데 그 산상에 월악산성(백제 때 쌓은 토성으로 지금은 폐성됨)이 있어 성(城)자와 이 마을에서 진주정씨가 많이 살고 있어 주(州)자를 따서 성주라 했다. "밭다래기"라고도 부르는데 다래기인 내동지변 마을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월악리 봉덕(鳳德)

300여 년 전 평산신씨가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 후 진주정씨 황의 후손 정종길(鄭鍾吉) 삼형제가 장성군 삼서면 금산리에서 옮겨와 그의 후손들이 주종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성씨 중에서는 진주정씨 다음으로 남평문씨가 45년 전에 입촌했으며 그 후 청송심씨, 광산김씨, 김해김씨, 나주정씨, 전주최씨, 영동김씨의 순서로 들어왔다. 마을의 지형이 봉황새처럼 생겼다 해서 마을 이름을 "봉덕(鳳德,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했으며 마을 뒤 부봉산 중턱에 1906년부터 50여 년 동안 성암선생(省庵先生:鄭炳休)이 학장을 한 봉산제가 있는데 지금도 흔히들 봉덕서당이라고 부른다.

월악리 노동(鷺洞)

1600년대 말경 김해김씨 김처기(金處基)가 함평군 손불면 대전리에서 살다가 열세 살 때 부모를 여의고 방황하던 끝에 이 마을에 터를 잡았는데 천년은 안주할 곳이라 생각하고 열다섯 살 때 전주이씨의 딸과 결혼하여 삶의 보금자리를 이루고 살았으며 현재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예전에는 신성(新城), 녹동(祿洞,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불리어 오다가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에 어떤 지관(地官)이 이 마을의 지형이 백로(白鷺, 해오라기) 형국이라 하여 "노동(鷺洞, 1914년 행정구역 지명)"이라 했으며 마을 이름에 걸맞게 전에는 백로가 마을 앞에 둥우리를 치고 많이 살았다 한다.

월악리 연당(蓮塘)

이 마을 첫 입향조는 진주정씨 정태일(鄭泰一)로 그의 부 정종순(鄭宗舜)이 영광군 대마면 군동에 살면서 아들 5형제를 낳았다. 그중 막내가 월악리 내동 마을로 옮겨왔다가 다시 이 마을로 이거하여 광산김씨의 딸을 맞아 정착했는데 그때가 1500년대 중순경이다.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성씨 중에서는 김해김씨 1호가 1910년에 입촌했으며 해평길씨와 순흥안씨가 1호씩 살고 있는데 근래에 들어왔다. 이 마을은 오목한 소쿠리형이며 마을 앞에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서 연꽃이 피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해서 연꽃 연(蓮)자와 못 당(塘)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연당(蓮塘,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했다.

월악리 죽산(竹山)

진주정씨 충장공 황(璜)의 후손인 정성(鄭晟)은 월악리 내동 마을에서 출생하여 조선시대 선조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시강원 설서(侍講院 設書)로서 세자(世子)를 강의하였는데 인조조 때 하향하면서 고향인 내동 마을에서 거주하다가 1600년대 초경 이 마을로 옮겨왔으며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다. 마을 앞 돌뫼지석묘군 옆들을 청계동(淸溪洞)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곳에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지금도 논을 갈 때 깨진 옛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이곳은 1985년에 경지정리가 됐으며 솔대를 꽂는 돌이 발견됐다. 아마도 이곳 일대는 지석묘가 분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에 주거지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해서 "죽산(竹山)"이라 했으며 "대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월악리 죽산 마을을 함평 대매라 하며 인근 삼서면 금산리 죽산 마을을 장성 대매라 부르고 있다. 장성군 대매도 1912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성군 삼남면(森南面)이었다가 함평군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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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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