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월리

용월리 내세

마씨들이 번창하게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마을주변에 마씨들의 묘라 하여 마총으로 불리우는 옛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다. 마씨 다음으로는 정지아 후손인 나주정씨 정진이 1500년대 중엽 양정리 양지마을에서 옮겨와 정착했으며 현재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다. 또한 칡텃밭으로 전해오는 곳에 고인돌이 분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에도 이미 주거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 성씨 중 나주정씨 다음으로는 함평이씨가 80년 전에 입촌 했으며 전주리씨와 김해김씨 등 타 성씨는 근래에 들어왔다, 원래는 갈동면 내장돌이라고 했다는데 후에 “안잔골”로 알고 “내세동”이라 기록한 것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용월리 외세

이 마을 역시 마씨가 살았고, 그 후 입향한 성씨로는 나주정씨로 정응은 임진ㆍ정유재란의 충신으로 월야면 양정리 양지에서 태어나 1500년대 말경 옮겨왔으며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성씨 중에는 광산김씨가 190년 전에, 언양김씨와 선산김씨가 100년 전에, 기계유씨가 80년 전에 입촌 하였고, 광산김씨, 경주최씨, 진주정씨도 살고 있다. 이 마을 역시 내세마을과의 사이인 칡 텃밭에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산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산의 옛말 ‘받’, 즉 ‘받안골’인데 ‘밧장골’ ‘밧잔골’로 불리어지게 되어 한자로 표기하면서 원뜻과는 달리 밧장골로 표기하였고, 다시 ‘잔’이 ‘가늘다’ ‘작다’로 변하여 ‘세’로 바뀌어 “외세”가 되었다.

용월리 노장

이 마을 역시 마씨가 살았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 후 이천서씨가 입촌 했는데 이천서씨 보첩에 의하면 서희찬이 기산의 동쪽 30리 오수산 아래 노장마을에 입촌 했다는 기록과 고려 고종조때 유무의란을 평정한 공으로 기성군에 봉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입향년대는 1200년대 말경으로 여겨지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열녀조에 실려 있는 박씨의 남편 서중원과 또 한명의 박씨의 남편 서윤중이 서희찬의 후손으로 조선조 이전에 명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천서씨 다음으로는 현존 성씨 중에서 나주정씨, 광산노씨, 청송심씨, 함평이씨가 차례로 입주해왔다. 그러나 마을 뒤 찰방 등에 고인돌이 분포된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전부터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나이가 많은 장사들이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라 해서 노장이라 했다 하며 마을의 지형이 길다 해서 “길주군”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용월리 월봉

이천서씨가 맨 먼저 입촌 했다 하며 그 후 박씨가 살았다고 하나 자세한 입향유래는 알 수 없다. 박씨이후 광산김씨, 창녕성씨, 한양조씨, 나주정씨, 상산김씨가 차례로 입촌 했다. 마을 앞에 한새들이라 부르는 넓은 들이 펼쳐져있어 농경생활에 적합한 곳으로 옛적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인근 노장마을의 사이에 고인돌이 분포된 것으로 알 수 있다. 마을의 생김새가 달 같이 생겼다하여 월봉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정식 표기되었다.

용월리 용두

마을 내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마을 앞에서 청동기 시대의유물인 돌촉, 돌칼이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 성씨 중에서 맨 처음 입촌한 성씨는 기계유씨로 유덕주가 1600년대 말경 나산면 용두리 석현마을에서 옮겨 왔다. 그러나 기계유씨가 입촌 하기 전에 고성이씨, 천안전씨, 동래정씨가 살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마을 뒷산이 오수산인데 이 산에 용머리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용두”라 했다 한다. 오수산맥이 뻗어내려 월야면과 나산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산맥이름을 용의 코라 하여 “용두코재”라고 부른다. 그 산맥 양편마을을 월야용머리, 나산용머리로 각각 부르고 있으며 1914년 월야면이 신설되기 전에는 갈월용머리, 식지용머리로 불렀는데 지금의 월야면이 갈월면이었고 나산면 식지면이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어옹산망이라는 명당집터를 찾는다고 풍수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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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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