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의 역사

함평천지 (咸平天地 )늙은몸이 광주(光州)고향을 보랴하고...로 시작되는 호남가의 첫머리에 나오는 함평(咸平)이란 지명은 조선 태종9년(1409)에 함풍(咸豊)과 모평(牟平)을 합해 ‘함풍’에서 ‘함’자와 ‘모평’에서 ‘평’자를 붙여 만들어진 고을 이름이다.
두루 평안하게 살고자 했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함평은 예로부터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되었고 쌀맛이 좋고 질이 좋아 ‘함평 쌀밥만 먹은 사람은 상여도 더 무겁다’라는 속담이 나올 정도였다 .
함평은 높은 산이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려말 공민왕이 와서 서해를 바라보고 놀았다고 해서 군유산(君游山,403m)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이 가장 높을 뿐이다..
함평에는 기산영수로 불리는 명승지가 있는데. 함평읍 동북방 함평공원의 둔덕과 그 밑 함평천을 일러 중국 하남성(河南省)등봉현(登封縣)의 전설적인 땅에 비유하고‘기산 영수’라 했던 것이다.
흔히들 함평을 예찬할 때‘기산 영수로 이름높은곳’이라고 하는데 함평사람들은 이 기산의 지조를 고을정신으로 이어받아 왜적에 협력하지 않는 고을로 이름났기 때문에 삼성삼평(三城三平 보성, 곡성,장성,그리고 함평, 창평, 남평)중 한 고을로 꼽히고 있다.
연혁
-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함평에 사람이 거주 했다고 당하산 유적 발굴 중신석기 문화층 발견 ․ 원삼국시대 함평은 마한의 영역에 속했는데 마한은 54개 소국으로 형성,
-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이 된 해는 명확하지 않으나 백제 동성왕20년(498)8월에 탐라를 치기 위해 왕이 무진주(현 광주)에 머물었던 이후부터 완전히 백제의 지배권에 들어감
- 조선조 태종 9년(1409) 함풍현과 모평현을 통합하여 함평이라고 함
- 1963년 1월1일 함평면이 함평읍으로 승격 1읍 8면을 관할 함
- 1973년 7월1일 학교면 상옥, 금곡,백호, 월송리를 대동면에 편입
- 1982년 대동면 서호리의 분매,호정,성정,서변,동호,마을과 연암리의 수현, 수암마을이 대동댐 축조로 수몰 됨
- 1987년 1월1일 함평읍 성암리일부와 학교면 사거리 일부가 엄다면에 편입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