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각리

기각리 옥천(玉泉)

이 마을은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는 누각마을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정리때 비대해진 누각마을을 옥천마을과 분리하였다. 옥천(玉泉)이란 이름은 지금도 옥샘이라 부르는 샘에서 유래되었으며 함평 객사를 지을 때 인부들이 이 샘물을 먹었다고 하는데 현존하고 있는 이 옥샘은 약 200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기각리 누각(樓閣)

함평읍 소재지에서 0.5km 지점, 함평리와 내교리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인데 희우루(喜雨樓)라는 누각이 있었던 곳이어서 마을 이름을 누각(樓閣)이라고 하였다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비대해진 누각을 옥천마을과 분리하였다. 또 이때 현 함평군청이 있는 일대가 함평리 도화마을에 편입되었다.

기각리 시장(市場)

옛 시장마을을 구시장, 지금의 시장마을을 신시장이라 분리하고 있다. 신 구시장을 통틀어 전에 기영리(箕??里)라 불렀고(1789년 호구 총수 마을명)후에 천변리(川邊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명)라 불렀다. 옛 시장은 처음에는 강정시(江亭市), 후에는 읍전시(邑前市)라 불렀고 지금의 시장은 함평장 또는 함평시장이라 부르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성씨는 수십 성이며 그중에서 김해김씨, 함평이씨, 밀양박씨 등이 많이 살고 있다.

기각리 구기산( 箕山)

구기산( 箕山)에는 함평이씨가 세거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박팽년의 천거로 참봉직에 있다가 단종 퇴위에 항거하여 신말주와 함께 관직을 버리고 귀향한 이안이 1455년 현 관덕정 자리에 영파정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함평이씨가 기산에 정착한 것은 530년이 훨씬 넘음을 알 수 있다. 함평이씨의 뒤를 이어 약 400여 년 전에 대구서씨가 입촌했는데 대구서씨 서세방은 선조때 사간원 헌납관으로 있다가 1589년 기축옥사 때 벼슬을 버리고 기산에 정착했다. 현재 이 마을에서 제일 많은 가구를 차지하고 있는 김해김씨는 근세에 백곡에서 이주 정착했다. 기산이라는 마을 이름은 중국의 하남성 등봉현(河南省等封縣) 남동쪽에 있는 기산(箕山)에서 따온 이름이고 기산마을 동쪽을 휘감고 도는 냇을 영수(潁水)라 하는데 이도 중국의 하남성 등봉현의 영수(潁水)에서 따온 이름이다. 흔히들 함평을 예찬할 때 "기산 영수로 이름 높은 곳"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기산 영수는 "기산지절(箕山之節)" "기산지지(箕山之志)"로 고사에서 비유되고 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직 청렴하게 기산에서 살던 허유(許由)가 요임금으로 부터 자기에게 양위를 할까 한다는 말을 듣고 듣지 못할 소리를 들었다하여 영수에서 귀를 씻고 있는데 소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오던 소부(巢父)가 허유의 귀 씻은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상류로 올라갔다는 고사가 서린 곳이다. 그러면 함평의 기산 영수는 언제부터 부른 이름인가? 1445년 단종(端宗)의 퇴위에 항거하여 관직을 버리고 신말주(申末舟 신숙주의 아우)와 함께 향리(현 구기산)로 내려와 허유와 소부의 지조를 추앙하며 티없이 살기로 맹세한 이안(李岸)이 냇가에 정자를 짓고 영파정(潁波亭)이란 액호를 붙인 뒤 "箕山"과 "潁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안이 낙향하여 살기전의 기록들을 보면 영수천은 대천(大川)으로 기록되어 있고 "箕山"이란 이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산의 형국이 키(사투리의 치)형국이어서 "箕山"이라 했다고도 하나 그보다는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

기각리 신기산(新箕山)

이 마을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호구가 늘자 신기산으로 부르게 된 마을이다. 현 교육청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동부(東部)에 속했으며 중앙교회 쪽 보건소 쪽은 기산(箕山)에 속했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 교육청자리에 일인(日人)들의 교육도장인 남소학교(南小學校)가 들어선 후에도 교육청 뒷 편은 뽕나무 밭이었으며 농협창고 근처에 띄엄띄엄 집이 몇 호 있을 뿐이었다. 기산에서 새로이 떨어져 나왔다 하여 신기산이라 마을 이름을 붙였고 밀양손(孫)씨 득은(得殷), 남평문(文)씨 종현(淙鉉), 장수황(黃)씨 광연, 함평모(牟)씨 만기(万基), 함평이씨 동엽등이 1930년대에 입촌하였고 그 이전에 몇 집 살았던 이천서씨 등은 그 후손이 모두 이주하여 정확한 입촌 년대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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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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