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리 예동( 洞)
이 마을은 전에 영풍면(永豊面)에 속했으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연화동(連化洞)이라 표기되어 있다. 후에 반월동(半月洞)이라 불렀으며 1945년 이후 예동( 洞)이라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김해김씨 일(鎰 1614~1663)이 1640년경 개촌했으며 후에 함평모씨, 나주정(丁)씨 경서(京西)가 120여년전에 입촌했다.
수호리 평호(平湖)
뒷산의 형태가 평사낙안(平沙落上)이란데서 평동(平洞)이라 부르다가 기러기가 호수를 만나야 제격이란 뜻에서 평호(平湖 1789 호수 총수 지명에도 영풍면 平湖라 표기됨)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이웃 예동에 자리잡은 김해김씨 후손 익성(益星 1660~1737)이 1680년경에 개촌했으며 1860년경 함평모씨 대달(大達 1841년생)이 대화에서 이주해왔다.
수호리 수산(水山)
1789년의 호구총수 지명에 보면 이 마을은 신마노면(新馬老面 현 엄다면의 일부)에 속해 무안현 땅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 기성면(箕城面 현 함평읍 일부)에 속해 함평군 땅이 되었다. 마을 이름 수산(水山)은 옆에 있는 수산(水山)이란 산명(山名)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수산(水山)이 기재된 것을 보면 이 산 이름이 옛부터 수산으로 불리운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이 산은 화산(火山)이었는데(산정에 분화구 형태가 지금도 남아 있음) 불의 피해를 막기 위해 수산(水山)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어떤 사람은 무안현감 이석우가 해동(海洞) 마을 앞 직영제에서 쉬면서 수산을 보고 청사초롱에 불 밝혀라 했다 해서 화산(火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원래 나주임(林)씨 영(泳 전라관찰사 대사헌 역임)의 후손들이 살았고 숙종 을축년(1685)에 수산사(水山祠)를 세워 임영을 배향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임씨들은 한 집도 살고 있지 않으며 함평모씨 규백(奎伯)이 1810년경에 입촌 했고 이어 함평이씨들이 들어와 살았다.
수호리 해동(海洞)
이 마을은 영풍면에 속했으며 연묵(硯墨)은 있으나 나는 물이 없다하여 해동(海洞)이라 했다고 마을 표석에 씌어 있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海洞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이 마을은 변함없이 海洞으로 표기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마을 앞까지 영산강을 타고 해수(海水)가 올라왔다는 전설을 생각할 때 海洞이란 이름이 붙여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창녕조(曺)씨 정( 1610년생)이 개촌 했으며 1648년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해동마을의 이름을 빛냈다. 대대로 자작일촌을 이루었으며 60년 전에 함평이씨(世範)가 입촌 했다.
수호리 대등(大等)
이 마을은 허씨가 개촌 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허씨가 마을을 이루기 전에는 다래와 칡과 등나무등 덩굴이 얽혀져 있는 곳이라 해서 등라(藤蘿)라고 했다고 하는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大藤蘿로 표기되어 대등라촌으로 불리운 것을 알 수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등(大等)으로 표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촌 했다는 허씨는 현재 그 후손이 살고 있지 않으며 그 후 금성나씨 덕선(德宣)의 둘째 아들 무삼(茂杉)이 1580년에 입촌 하였고 입향조 무삼은 대화촌에 있던 함평향교가 정유재란 때 불탄 후 대동면 향교리로 옮겨 짓는데 공을 세웠다고 하며 이어 함평이씨 덕일(德一 임진란공신 우국가 28장을 남김)과 덕인(德仁 1552년생)이 1590년경 입촌 했는데 이덕일은 금성나씨 덕선의 사위였다. 登 밀양박씨는 박정호(朴挺豪 1758년생)가 1780년경에 이주 정착하였다.
수호리 송정(松亭)
이 마을을 개촌 한 사람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 장군과 창의하여 금산전등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선무원종 공신록에 책록된 하동정씨 기린(麒麟 1558년생)으로 그 후손이 대대로 살다가 중간에 마을을 떠났으며 최근에 후손이 다시 입촌 하여 현재 2호가 살고 있다. 지금은 대등 쪽에서 이거 정착한 금성나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원래 이 마을은 화전(花田)이라고 했다고 하나 火田마을이었을것 같으며 현재 부르고 있는 송정(松亭)이란 이름은 1789년 호구 총수지명과 동일하여 오랜 옛부터 송정이라 부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