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암리

동암리 벽초(碧草)

동암리 벽초

1600년대에 광주정씨, 1800년대에 양성이씨, 나주나씨, 광산김씨, 김해김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앞의 우마산이 와우형국(臥牛形局)이므로 푸른 풀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붙여진 "벽초(碧草)"라는 이름은 마을 뒷산의 마구청, 구수골 등의 지명과 함께 풍수객이 붙여준 이름이라 전한다.

동암리 동백(冬栢)

동암리 동백

정확한 기록이 없어 최초의 입촌자와 입촌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앞에 있는 나무의 수령에 비추어 보아 약 5백 년 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광주정씨 정이갑(鄭履甲)이 입촌한 뒤 뒤따라 김해김씨, 파평윤씨, 진주강씨 등이 입촌하여 살고 있다. 이 마을은 동백나무가 많아서 "동백(冬栢)" 마을이 되었고 속칭 "통골(通谷)"이라 부른다. 마을 앞 계곡 주변에 5백여 년 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우거져 있고 40년 전까지 백양서당이 있었으며 면제도가 실시된 초창기(1913~1920)의 면사무소와 주재소 자리가 유적지로 남아있다.

동암리 매곡(梅谷)

1510년 경 고부이씨가 삼괴동(三槐洞 1789년 호구총수지명)에 입향했는데 고부이씨의 터는 현재 밭으로 변하였으며, 소동이라 부르던 곳에 광주정씨 정인근이 1560년 무렵 입향한 후 효자가 많이 배출되자 "효동"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분유골에는 1750년경 김도재가 입촌한 후 뒤따라 광주정씨, 파평윤씨 등이 입촌했다.

동암리 복암(伏岩)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천안전씨 전이제(全以是)가 입향하여 그 후손이 200여년을 살다가 선산만 남겼고 1750년대에 입촌한 함평이씨와 광주정씨, 그보다 50년 후에 입촌한 남평문씨, 광산김씨 등이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동암제 밑에 바위가 깔려 있어 마을 이름을 "복암(伏岩)"이라고 하였는데 보통 "모라재"라 부르고 있다.

동암리 복흥(伏興)

이 마을은 먼저 형성된 이웃 최동동(崔童洞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나옴)이 큰 화재를 입고 난 후 자리 잡은 터라고 하며 그 이후 약 1600년경에 함평이씨 이사급(李思扱)이 입촌한 후부터 자작일촌을 하고 있다. "엎드린 고랑에서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마을이라서 마을 이름을 복흥(伏興)이라 하였다 하는데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는 복흥(卜興)으로 표기되어있고 1914년 행정개혁개편 이전의 지명에는 복흥(伏興)으로 표기되어 있다. 1960년에 준공한 저수지 복흥제가 있어 이곳 주민들의 전답을 몽리하고 있다.

동암리 초동(草洞)

1840년경 강릉유씨 유현원(劉鉉源)이 아들 유병세(劉秉歲)와 함께 입촌 하여 살면서 후손이 번창하였고 지금은 중뫼와 "초동(草洞)"에 유씨, 이씨, 박씨 등이 살고 있다. 초동은 본래 최동(崔洞)으로 최씨의 터라고 하는데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최동동(崔童洞)이 있어 사실임을 알 수 있고 한때 마을이 불타버리고 다시 일어난 마을이라고 한다. 신광면과 경계지점에 주막거리로 속칭 "쑥댕이"라 부르는 예등(艾嶝 1914년 행정구역개편 마을이름) 마을이 있었던 듯하나 지금은 동암리 2번지 손씨집 한 채가 주막의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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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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