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리

구산리 구산(九山)

마을의 윗당산나무와 아랫당산나무의 수령으로 짐작해 보면 마을 터가 생긴지는 약 5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원선리 앵소산에 묘를 모실 때에도 구산과 백양 등지에 살았으므로 김씨의 구산리 입주는 1500년경이다. 그 후 함평이씨는 1700년경 이시정(李時廷)의 증손 항림, 흥림, 회림 삼형제가 구산리에 입주하였다. 불갑산에서 맥을 이룬 마을 뒤에 비취산이 위치하고 광영제에서 흘러온 시냇물이 거북산을 끼고 흐르며 천주봉에서 시작된 맑은 물이 비취산을 돌아 흐르고 있으며 몇 아름이나 되는 수십 그루의 큰 정자나무가 에워싸고 있는 마을의 경관은 가히 가관이라 극찬할 만 하다. 본시 마을의 이름은 삼구동 앞산이 거북이 세 마리가 나란히 엎드린 것 같다 해서 "구산(龜山 1789년 호구총수지명)"이라 했는데 현재는 쓰기 쉬운 글자로 바꿔 "구산(九山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전)"으로 쓰고 있다.

구산리 내동(內洞)

함평이씨 이시정의 종손 항림, 흥림, 회림 삼형제의 자손들이 마을을 형성했다는 말만 전해지는데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며 그 후 광산노씨가 삼구동에서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현재까지 이 마을의 주종을 이루며 살고 있다. 천주봉, 구절봉, 연대산의 봉만이 우뚝 솟은 높은 산봉우리와 골짜기 사이에 흘러가는 구름은 마치 신선도를 보는 듯한 천하일품의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깊은 산속에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내동(內洞 1789년 호구총수지명)"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구산리 냉천(冷川)

남평문씨 문영호(文永灝)가 마을 뒷산에 부친을 안장하고 나서 3년동안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외부 출입을 금하며 시묘살이를 한 후 마을 터를 잡고 생활한 것으로 미루어 마을이 형성된 지 100여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1789년 호구총수지명에 내천동(內泉洞) 지명이 바로 이 마을임으로 일찍이 마을이 있다가 폐촌된 후 다시 마을을 문영호가 이루었다고 한다. 국도 24호선 상에 위치한 이 마을은 대동면과는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면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구산청이 흐른다. 동네 앞 샘물이 맛이 좋고 시원했던 까닭에 내천동(內泉洞 안샘마을)이라 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냉천동(冷川洞)"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관내에서 물맛으로는 으뜸가며 가뭄에도 샘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는데 물맛이 좋은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공동우물을 팔 때 구미산의 맑은 날씨에 오색구름이 떠다니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생기가 감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산리 삼구(三九)

삼구터에는 함평이씨가 가장 먼저 입촌했다고 하나 지금은 한 세대도 없으며 그 후 광산노씨가 정착했는데 구산파의 증조인 노찬원은 1579년(선조12년)에 출생해서 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이 된 인물이다. 그러므로 광산노씨는 약 400여 년 전에 삼구동에 들어왔다. 마을의 모습이 거북이 세 마리가 물을 마시려고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하여 삼구라 했다 한다. 앞 거북뫼와 마을 뒤의 잔등이 거북이의 모습이고 덕림교에 위치한 닭머리산도 옆에서 보면 거북이의 모습이어서 마을 이름을 세 마리의 거북형태라는 의미의 "삼구동(三龜洞 1789년 호구총수지명)"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편의상 구(龜)자를 거북구자가 아닌 아홉 구자를 써 "삼구동(三九洞 1914년 행정구역 개편명)"이라 했다고 전한다.

구산리 삼성(三星)

마을 주변에 고인돌이 많이 산재해 있고 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석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근세에 이르러서는 배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나 구설일 뿐이고 현재는 광산노씨, 남평문씨, 이천서씨 등이 살고 있으며 400여년의 터로 본다. 삼성리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삼태성(三台星)이 보인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삼성(三星)"이라 했다고 했다.

구산리 광령(廣嶺)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 년 전에 터가 형성되었다고 전할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며 밀양박씨, 남평문씨, 제주양씨 등이 살고 있다. 불갑산에서 뻗은 큰 능선을 사이에 두고 대동면 강운리와 면계를 이루며 광영제(廣嶺堤)에서 시작된 맑은 물이 마을 앞을 지나 구산천과 합류하여 고막천에 이른다. 이 마을은 산골이 깊고 능선이 많으며 산골짜기가 아흔아홉 개나 된다. 이처럼 골짜기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광령(廣嶺 1789년 호구총수지명, 廣令)"이라 하였다 한다.

구산리 주동(舟洞)

이 마을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어느 성씨가 먼저 정착했는지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나 함평이씨 및 광산노씨의 선산이 이 마을 주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삼구동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생각되며 약 150여 년 전의 터로 본다. 마을 형국이 배의 형국이라서 마을 이름을 "주동(舟洞)"이라 했다 하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샘을 파면 배의 밑을 뚫는 것이 되므로 샘을 못 팠다고 하며 지금도 물이 잘 나지 않고 가뭄에는 물이 귀한데 이는 배 밑이 두꺼워서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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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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