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리 석지(石池)
마을 앞산과 뒷산의 여러 곳에서 고려자기가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500여년이 넘는 마을로 추정된다. 나주정씨(羅州鄭氏) 정중재(鄭重載)가 나주에 살다가 마을 뒷산의 아름드리 노송(老松)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고 수 백 년 묵은 백일홍이 활짝 피어있어 마을의 경치가 아름다워 정착하였다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석령(石令)으로 표기되어 있는 이 마을은 아주 오랜 옛날에는 이곳이 바다였다고 하며 송산교 앞들을 염바대( 海)들이라 한다. 배문이(船泊)에서 배를 묶고 쉬어가다가 큰 바람을 만나면 바람을 피하고자 이 마을에 자리(席)를 잡으러 들어와 배를 매었다고 해서 한때는 "석지(席池)"라 했으나 현재는 쓰기 쉬운 글자로 바꿔 석지(石池)라고 하며 마을의 지명은 주박골(船泊), 소백이(小泊)등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이문리 원이문(原二門)
상산김씨(商山金氏)가 경북 상주에서 살다가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는 말만 전할 뿐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며 현재까지도 상산김씨가 자작일촌하고 있다. 이 마을은 석문(石門), 이문(二門), 땅모랭이로 지금은 한마을이지만 원래는 이문과 석문의 2개 마을이었다. 이문은 자연석(自然石)으로 된 돌문이 있어서 이문이라 하였고 석문은 좌우로 큰 바위가 문간처럼 서 있었으므로 석문이라 했는데 지난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의한 골목길 확장 시 바위를 파손시켜버려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석문과 의문을 합하여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이문내리(里門內里)라 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이문(梨門)으로 표기했고 지금은 원이문(元二門)이라 한다. 또한 땅모랭이라는 이름은 이문의 맨 끝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며 이 마을에는 약 5백년 된 정자나무가 있는데 상산김씨가 정착하여 심은 것이라 한다.
이문리 사정(沙亭)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노령산맥 중 한 연맥이 외치 칠봉상을 이루고 오수산에서 마무리되었다. 오수산 최 하단에 위치한 이 마을은 기름진 월야평야와 평들이 툭 트여 한눈에 들어오고 장성 대청산에서 흐르는 맑은 시내가 이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이 시내에는 천렵군들이 군침을 삼키는 물고기들이 무리지어 논다 사정(沙亭)마을은 조선조 세종 때 김덕생(金德生)의 아들 중명(仲明)이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이 마을에는 윗당산나무와 아랫당산나무가 있는데 한 그루는 둘레 6m, 높이 30m인데 수령 500년을 추정하고, 또 한 그루는 둘레 4m, 높이 35m에 수령 500년을 추정하는데 이 정자나무와 마을의 정착유래가 같은 것으로 믿고 있다. 이 마을 앞에 있는 산 이름이 재산(載山)이므로 마을 이름을 재산이라 하였는데 최초에 정착한 중명(仲明)의 부친인 김덕생(金德生)의 호가 증산(甑山)이므로 "載山"을 "증산(甑山)"으로 고쳤다고 하며 1789년 호구총수지명에는 내증산(內甑山) 현재는 사정(沙亭)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