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리

월산리 송정(松亭)

월산리송정

이 마을 토광묘에서 청동기 유물인 꺽창(銅戈)이 출토된 것을 미루어 볼 때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문헌상 확인할 수 있는 성씨로는 광산김씨가 제일먼저 입촌했다. 첫 입촌자는 태종 때 이조좌랑을 지낸 김경온(金景溫)이며 그는 아들 자분(自芬 1419년생), 자보(自普 1421년생), 자궤(自궤 1424년생)등 3형제와 더불어 1450년경에 입촌했다. 그의 후손은 이 마을에서 4~5대 동안 현달한 인물을 배출하며 살았으며 자분의 후손은 현 학교면 금송리 금산으로, 자보의 후손은 대동면 금곡리 나막으로, 자궤의 후손은 장흥군 관산으로 떠나 지금은 그 후손이 이 마을에 단 1호도 살지 않는다. 이후 본관을 알 수 없는 박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하는데 그 후손이 하나도 없어 밝힐 수가 없으며 박씨에 이어 충북 충주에서 낙향한 충주지씨들이 약 300여 년 전에 들어왔고 그 뒤에 청주 한씨 등 여러 성받이가 입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무안현 좌랑촌면(佐郞村面)에 속했고 좌랑촌이라 불렀는데 그 유래는 이렇다. 이 마을을 개촌(開村)한 김경온이 이조좌랑을 역임했고 큰 아들 자분이 143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종성 부사를 역임했으며 둘째 자보가 병조좌랑 셋째 자궤가 음사로 이조좌랑을 역임했다. 한 마을에서 좌랑벼슬 셋이 나오고 부사벼슬이 나왔다하여 촌명을 좌랑촌이라 했고 면명도 좌랑촌면(후에 좌랑면,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했다는 것이다. 현달한 인물을 배출했던 광산김씨들이 마을에서 떠난 후 송정(松亭 1789년 호구총수지명)이라 했는데 이는 마을 주위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성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때 무성했던 소나무중 현재 2그루가 남아있어 매년 정월 보름 때 당산제를 지냈는데 근년에 이르러 제를 지내지 않는다.

월산리 송산(松山)

월산리송산

이 마을은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여산송씨가 입향하였다고 하나 그 후손은 없고 1560년경 함평노씨 철계(哲季 1531년생)가 입촌하여 살다가 그 후손이 판교촌으로 이거했으며 300여 년 전에는 평강채씨, 뒤를 이어 동복오씨가 입향하였다. 그리고 해남김씨는 50~60년 전에 입향하여 현재는 다수의 성씨가 모여살고 있다. 옛날 솔메등이라고 하는 별로 높지 않은 언덕에 많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소나무 '송(松)'과 '뫼산(山)'을 써서 마을 이름도 송산(松山 1789년 호구총수지명도 동일)이라고 하였다 한다.

월산리 신흥동(新興洞)

월산리신흥동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평강채씨가 입향한데 이어 무안박씨가 입향하였고 250여 년 전에는 장흥고씨가 입향하였으며 현재는 여러 성씨가 모여살고 있다. 옛날에 서로 다른 두 성씨가 입향하였는데 나중에 입향한 성씨가 먼저 입향한 성씨보다 더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마을이름을 "신흥동(新興洞)"이라 하였다 한다.

월산리 월봉(月峯)

월산리월봉

이 마을에는 1500년경에 광산김씨(光山金氏) 경온(景溫)의 후손이 최초로 입향하여 월명촌(月明村)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며 그 후 1908년에 입향한 평강채씨(平康蔡氏) 기성(奇成)과 전주리씨(全州李氏 1908), 이천서씨(1908년)에 이어 파평윤씨가 입촌하여 살아오고 있다. 마을 앞 시냇물에 지는 달빛이 은빛 찬란하게 아름다운 서반월(西半月, 서쪽의 달밤)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월봉(月峰 1912년 행정구역개편 지명)"이라고 하였다 한다.

월산리 반암(磻岩)

월산리반암

백여 년 전에 율동에서 파평윤씨가 입촌하여 4대째 살아오고 있으며 이어 함평노씨가 입촌했다. 반암이란 지명보다는 "돌밭"이라 부르고 있으며 근래에는 이농현상에 따라 8호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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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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