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리

학교리 학다리, 신학, 백학

학교리 학다리, 신학, 백학

1562년 흥덕장씨인 의(懿)라는 사람이 이주 정착하였으며 1800년대에는 신안주씨 계춘이란 사람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이후 여러 성씨가 모여 살면서 인구수가 많아지고 지역이 넓어짐에 따라 운영리가 분할되어 현재 학교1리 학다리, 학교4리 신학, 학교6리 백학으로 되어 많은 성씨가 살고 있다. 마을의 형국이 학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옛날에 마을 앞까지 호수처럼 물이 찼을 때 학이 많이 날아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장수하는 학을 으뜸으로 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정확한 유래는 잘 알 수가 없지만, 1789년 호구총수지명에는 호양촌(湖陽村)으로 되어있으며 지역이 넓어진 지금은 학교1리(鶴橋1里) 학다리, 학교4리(鶴橋4里) 신학, 학교6리(鶴橋6里) 백학으로 정하여 각각 마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학교리 이암(耳岩)

학교리 이암(耳岩)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하나 어느 성씨가 최초로 입향하여 살았는지는 모르며 300여 년 전에 진주정씨가 입향한 후 김해김씨와 광산김씨, 기타 성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뒤 산등에 귀모양의 바위가 있고 또 마을 모퉁이에 귀걸이를 방불케 하는 돌이 점점이 놓여 있어 옛날 함평에서 나주 동강을 가던 길손들이 "귀바위 모퉁이를 돌아 얼마 안가면 망월동 나루가 나온다"라고 귀바위, 귀바위하고 불렀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귀바위" 즉 이암(耳岩 1789년 호구총수지명에도 동일하게 표기됨)을 마을 이름으로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전에는 목포부 좌촌면이었다.

학교리 영화촌(永化村)

학교리 영화촌(永化村)

마을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김해허씨(金海許氏) 기회가 입향하였으며 그 후손은 허대평이다. 이어 창녕창씨, 김해김씨인 상구(祥九)와 상칠(祥七) 두 형제가 입향해서 촌락을 형성하였다. 그 후 처가인 능주구씨와 함께 살았다고 하며 현재는 많은 성씨가 모여 살아가고 있다. 원래는 영촌(永村 1789년 호구총수지명 무안군 진례면 영촌)이라 하였으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12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명을 "영화촌(永化村)"으로 바꾸어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목포부 진례면에 속했다.

학교리 쌍교( 橋)

학교리 쌍교( 橋)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광산김씨가 입향한 후 햔양조씨, 진주정씨가 입향하였으며 지금은 누가 먼저이고 누가 뒤에 입향하였는지 알 수 없는 많은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지명도에도 쌍교( 橋)로 표기되고 있는 이 마을은 마을 양 옆으로 하천이 있어 소학교(小鶴橋), 대학교(大鶴橋)로 불리는 두 다리(橋)가 두개여서 "쌍교"라 하였다는 것과 학(鶴)의 다리가 두개여서 마을 이름을 "쌍교( 橋)"라 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다리(橋)가 두개여서 마을이름을 쌍교( 橋)라 하였다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학교리 회춘동(回春洞)

학교리회춘동

광산김씨 회춘당 김대연(回春堂 金大衍, 1690~1783)이 1720년경 무안읍 고철에서 이거 정착했으며 90년 전 평산신씨와 이천서씨, 순흥안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살고 있다. 옛날에는 귀래촌(歸來村 1789년 호구총수지명)이었으며 지금도 이 이름의 음이 변형되어 "구재촌"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귀래촌의 내력은 알 수 없고 동구 밖 좌측, 지금의 당산나무 자리에 5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1837년 강한 폭풍우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고목의 뿌리에서 새순이 다시 돋아나와 지금의 당산나무가 상서롭게 자라므로 새롭게 봄이 돌아온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회춘동(回 春洞 1912년 지명)이라고 불리어오고 있다고 하며 또 개촌자 김대연의 호인 회춘당을 따 회춘동이라고 한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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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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