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창리

곡창리 곡창(谷昌)

이 마을을 최초에 이룬 성씨는 고(高)씨며 이어 김해김씨 김여경(金汝慶 1589년생)이 1600년대 초에 나주군 공산면에서 이거 정착하였고 1850년경에 밀양박씨 박영진(朴永震 1822~1894)이 입촌했으며 백여 년 전에 인동장씨 장흥서(張興緖)가 이주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예전(임진란전)에 군량미를 저장했던 창고가 있었기에 고창산(古倉山)이라 했는데(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도 古倉山으로 표기됨) 경술국치에 "倉"을 "昌"으로 바꾸어 표기하고 있다. 이 마을에 창고가 있었던 것은 전에는 영산강이 깊어 이곳까지 큰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곡창리 서당매(書堂山)

곡창리서당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밀양박씨가 입향한 후 전주이씨와 김해김씨도 뒤를 이어 입향하였으며 현재는 이 세 성씨가 마을의 주축을 이루며 살고 있다.70여 년 전만 해도 무명촌이었으나 옛날에 선비가 글을 가르치던 서당이 조그마한 산에 있었다고 해서 마을명을 "서당매(書堂山)"라고 하였다 한다.

곡창리 대곡(大谷)

곡창리 대곡(大谷)

이 마을은 1408년 전북 옥구에서 옮겨온 전라도수영(全羅道水營)이 1432년까지 존속한 수영터(水營址)로 대굴포 전라수영(大堀浦 全羅水營)이라고 불렀다.마을 동편에는 대굴사(大堀寺)라는 고려 때의 절이 1667년까지 있었고 지금 마을 상수원으로 쓰고 있는 샘은 옥천(玉泉)이며 창골은 강소창(舡所倉)터로 보고 있으며 수통막(水統幕)은 배가 들고나는 것을 통제하던 곳으로 여기고 있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전라수영의 설치로 미루어보아 아주 오래된 것이 사실일 것 같으나 개촌했던 성씨들의 유래는 전하지 않고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에 밀양박씨와 김해김씨, 함종어(魚)씨가 들어와 살았다. 함종어씨의 입촌은 대곡의 유적 대굴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안 현감을 지낸 어진열의 아들 묘소와 관계가 있다. 원래는 대굴포(大堀浦)였다. 우리말에 골과 굴이 혼동되어 쓰임에 따라 언제부터인가 대굴(大堀)이 대곡(大谷)으로 바뀌어 표기(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도 대곡이라 표기됨) 되었다. 대굴이 대곡으로 바뀌어 부름에 따라 이곳이 옛 수영터였던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가 근년에야 여러 기록에 의해 확증을 얻어 옛 수영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곡창리 신곡(新谷)

곡창리 신곡(新谷)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밀양박씨가 입향하였으며, 거의 동시에 제주양씨가 입향하였고 지금은 기타 성씨와 함께 살고 있다. 폭이 좁고 골짜기가 길어 옛날에는 "가는골(細골)"이라고 불렀으나 100여 년 전부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계곡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여기에서 마을명을 "신곡(新谷)"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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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5-1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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