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막리

고막리 원고막(元古幕)

고막리원고막

800여 년 전에 해주최씨가 개촌(開村)했다는 전언이 있으나 그 후손이 지금은 1호도 살지 않고 있으며 뒤를 이어 청주한씨(淸州韓氏) 양혜공파(襄惠公派) 천신(天信)이 1650년경에 입촌 그 후손이 주종을 이루고 있고 한씨 입촌 이후에 밀양박씨 등 여러 성씨가 입촌했다. 한천신(韓天信)의 고막원 입촌은 함평군에 청주한씨가 입향한 최초가 되기도 한다. 이 마을의 지명은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보면 고호(古湖)로 되어 있다. 현 영산강의 옛 지명 사호(沙湖)인 것을 생각 해보면 고호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고막에 원자가 붙은 것은 고려와 조선조 때 이곳이 원(院)이 있기 때문이며 고막이란 이름은 고막대사(古幕大師)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막대사는 약 700여 년 전에 마을 앞에 돌다리를 놓은 대사로 전해오고 있다. 1924년 간행 무안군지에 의하면 고막원에는 원루(院樓)가 있었고 중앙관청에서 내려오는 관원이나 지방수령이 순시를 할 때 휴게소로 썼고 또 신구 수령의 교대 장소로 썼다고 한다.

고막리 신촌(新村)

고막리신촌

이 마을은 약 200년 전 경주김씨가 입향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고 당시는 금동면 영천동(永川洞)이라 불렀고(1789년 호구총수 지명) 현재는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으며 원래 원고막에서 살았던 사람이 새로운 촌락을 형성하였다 하여 마을 이름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후에 "신촌(新村)"이라 하였다 한다.

고막리 광진(廣津)

고막리광진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천안전씨인 전경후(全景厚)가 입향한 후 광산김씨와 전주이씨가 입향하였으며 현재 천안전씨가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약 300년 전 전경후(全景厚)라는 사람이 입촌한 기념으로 마을 앞에 팽나무 두 그루를 심었는데 현재도 그 나무가 자라고 있다. 또한 그 당시 마을 앞이 바다였으므로 나룻배가 왕래하여 나루터가 있었는데 나루터의 명칭인 광나루터에서 유래되어 마을 이름을 "광진(廣津)"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마을은 목포부 진례면 광진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학교면 고막리로 편입되었다.

고막리 송암(松岩)

고막리송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청주한씨가 입향하였다. 그 후 김해김씨와 기타 성씨가 입향하여 살고 있으며 청주한씨가 마을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지형으로 보아 마을 뒷산에 소나무와 바위가 많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송암(松岩)"이라고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막리 재생원(再生院)

고막리재생원

이 마을은 1963년 초부터 개촌되었다. 군내 각지를 떠돌던 음성 나환자를 정착시켜 재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 하에 정착했는데 1982년 보조금과 융자, 주민 자체부담으로 11동의 가옥이 신축되고 취락 개선사업이 펼쳐졌다. 교육시설로 학다리 동국민학교 신성분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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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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