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리

연암리 옥련(玉蓮)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오씨가 들어와 처음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 앞에는 수령 약 300년생인 쐬나무와 200년이 되는 팽나무가 있다. 마을 뒷산의 옥녀봉에서 옥(玉)자와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둠벙(龍池)에 고운 연꽃이 만발하였다는 용둠벙의 연화에서 연(蓮)자를 따 마을이름을 "옥련(玉蓮)"이라 하였다 한다. 촌의 형태가 용녀가 용둠벙에 내려와서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12폭 치마를 걸쳐 입고 병풍산의 병풍을 둘러치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며 그 옆에는 신선이 바둑을 두며 때로는 화살을 쏘기도 하는 형이다. 때문에 이 마을 사람들은 옥녀와 신선처럼 정직하고 온순하여 자고로 사고 없는 마을로 소문이 났다.

연암리 상하금(上下今)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무안박씨 한분이 입주하여 살았는데 그 후 함평 이씨가 들어와 4~5호로 늘게 되었으며 또한 6 25때 피난하기 위해 이 마을로 찾아들었던 사람들이 정착하여 오늘의 마을이 되었다. 원래는 상금(上今)과 하금(下今)으로 구분하였는데(1912년 행정구역개편지명)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 마을을 합쳐야 부귀가 있을 것이라 하여 그 후 "상하금(上下今)"으로 불렀다 한다.

연암리 마치(馬峙)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함평이씨 3세대와 풍산홍씨 2세대가 씨족을 형성하여 촌락을 이루다가 1900년 이후 광산김씨와 무안박씨 등이 이주하여 왔고 6 25 무렵에는 도처의 피난민과 영세주민들이 모여들어 토착민과 이주민이 오늘의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1789년 호구총수지명에도 대동면 마치(馬峙)로 되어 있다.

연암리 구적(九積)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구적(九積)이 나오는 것을 보면 오래된 마을이나 오래전에 살았던 성씨들의 후손은 없고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현 주민들의 선조들이 이주하여 오늘의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에서 9명의 부자가 나올터라 하여 마을 이름을 "구적(九積)"이라 하였는데 마을 이름처럼 이 마을에서 9명의 부자가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빈곤하다 하여 오래 거주하는 집안이 없는 것이 특색이어서 선조의 얼을 받아 대대로 살아오는 성씨는 1~2호에 불과하다.

연암리 장재(長才)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 김해김씨가 거주할 터를 찾던 중 주위의 산세와 위치가 장수하고 수재가 많이 나올 형국이라 판단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고 마을 이름을 '장재(長才)'라 칭하고 살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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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04-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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