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야리

월야리 전하(田下)

언제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문헌이나 전하는 바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이 마을 좌측에 "광대묘실"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믿어지며 이곳에 "장터시암"이라 부른 둠벙이 있는바 장(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 성씨들의 입향년대는 진주정씨, 광산김씨가 맨 먼저 입촌했고 이어 함평이씨, 풍산홍씨, 전주리씨, 동래정씨, 하남정씨가 1800년대 말경부터 일제때에 걸쳐 입촌해왔다. 1922년에 마을 앞으로 광주~법성간의 도로(국도 22호)가 트이고 6 25동란 후 면소재지가 평촌 마을에서 이 마을로 옮겨 옴으로 해서 20여 호의 조그마한 마을이 260여 호가 넘는 마을로 번창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밭이 많았다하여 마을 뒷산에 밭이 있었던 흔적인 밭두렁이 군데군데에 그 형태가 남아있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연하도수(蓮荷倒水)형국이라 한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전하뫼(田荷山)"로 불러오다가 원뜻과 다른 "전하(田下, 1912년 지명)"로 표기되었다. 월야 입구(入口)란 지명은 면사무소가 평촌마을에 있을 때 면소재지로 가는 길목이어서 부르게 된 지명이다.

월야리 순촌(蓴村)

원래 이 마을은 함평노(魯)씨가 이루었는데 진주정씨 황(璜)의 아들 함도(함평 입향조)가 노씨 집안으로 장가들어 순촌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함평노씨 다음으로는 진주정씨 정희득(鄭希得, 해상록:저자) 후손들이 2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약 30년 전에 마을 가운데에 500년 이상 되었을 느티나무 1그루가 있었는데 고사(枯死)하고 없다. 이러한 일들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마을이 형성되기는 500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이 마을은 풍수지리의 형국이 운중반월(雲中半月)이며 노(魯), 정(鄭), 이(李)씨의 터라고 한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밤나무가 많아 "율촌(栗村, 밤까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했으며, 그 후 마을 앞 저수지에 순채(蓴菜)가 자생하여 이것이 상감의 진상품이 되고부터 마을 이름이 "순촌(蓴村, 1789년 호구총수 지명)"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저수지에 순채가 자생하고 있다. 예전에 이곳은 영광에서 광주로 가는 도로변으로 앞주막, 뒷주막이 있었으며 마을 또한 번창했다. 벼슬한 사람은 별로 없지만 양반마을로 유명하여 사람들이 좀 까다로웠다 한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 월촌과 순촌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에는 두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월야리 송계(松溪)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250년 전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70여 년 전 인근 괴정마을에서 진주정씨 정종악(鄭鍾岳)의 손자인 용근(龍根)과 동교(東敎)가 옮겨왔으며 그들이 입주하기 전에 최(崔)씨, 파평윤씨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나 지금은 단 1호도 없다. 이 마을은 소나무만 무성한 야산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송계(松溪, 1789년 호구총수 지명)라고 하였다.

월야리 동산(東山)

조선조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禦侮)장군을 역임한 정종문(鄭宗文)이 당시 인근 마을인 내동에서 분가하여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았다. 이 마을에서는 6·25동란 전만 해도 20여 호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전화로 불 타버리고 지금은 겨우 9호만이 마을을 유지하고 있다.이 마을은 내동 마을의 동쪽 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동산(東山,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고 했다 한다.

월야리 괴정(槐亭)

진주정씨 정희득(鄭希得, 海上錄 저자)의 아들인 적(??, 호 : 楓)과 아(我, 호 : 栗浦)가 마을 가운데 길을 사이에 두고 윗마을은 노상(路上), 아랫마을은 노하(路下)로 부르면서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400년 전에는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희득도 아들들이 살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마을에 살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리고 지금은 거주 호수가 7호에 지나지 않지만 40여 년 전에는 15호가 살았으며 이제 마을 규모가 작아 자연마을으로는 "송계(松溪)"마을에 속해 있는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570여 년 전에 진주정씨 선조 삼형제가 부친의 수연일(壽宴日)에 느티나무정자(槐亭)에 병괘사인(倂掛四人)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부친인 함도(咸道)는 함종현령이며, 장자인 유(維)는 고산현감이고 차자 면(綿)은 횡성현감이며 삼자 주(紬)는 무안현감으로 사부자(四父子)가 이 정자에 인(印)을 걸었다하여 사인정(四人亭)이라 하였다 하는 유래가 있는바 정자(亭子)이름이 괴정(槐亭)이란 마을 이름이 된 것 같다. 정자는 현존치 않으며 수령이 600년 이상 됐을 느티나무 1그루가 마을 앞에 있다. 조선시대 철종조때 승지(承旨)를 역임한 정종악(鄭鍾岳)의 아들인 복원(復源)과 손자인 성근(成根)이 천석군부자로 이름이 났는데 이 마을이 풍수지리설에 가마형국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월야리 평촌(坪村)

이 마을은 월악면 평촌리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월야면 월야리가 됐으며 몇 호에 불과했던 마을이 한일합방 이후부터 6 25사변 전까지는 월야면 소재지로서 면사무소, 함평경찰서 월야주재소, 월야보통공립학교가 있어 번창했으나 전화로 불타 소재지가 전하로 옮겨갔으며 6·25이후 월야중학교(53년 4월 7일 개교)가 세워질 때 28호가 떠나고 월야고등학교(72년 12월 26일 개교)가 세워질 때 8호가 떠나는 등 마을이 줄어들었다. 이 마을은 어느 성씨가 맨 먼저 터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 중에서는 함평이씨가 60여 년 전에 밀양박씨가 1930년경 진주정씨가 1933년, 전주리씨가 1943년, 동래정씨가 1950년경, 반남박씨가 1963년에 각각 입촌하였다. 평평한 들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평촌(坪村,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불렀으며 "중보(中堡, 1789년 호구총수 지명)라고도 불렀는데 고막천에 있는 지와보와 소림보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였다 한다.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두 마을이 나온 것을 보면 당시에 두 마을으로 분리했음을 알 수 있다.

월야리 장동(長洞)

일제때 국도(22호)가 면소재지 앞으로 트이기 전에는 광주 영광간 도로가 마을 앞에 있었으며 수박동(水泊洞)이라 부르는 곳에 장(場)이 있었다 하는데 현 문장시장이 이곳 장에서 구장터(용암리 용산 마을 뒤)로 옮겨갔다가 해보면 문장리 무내미(매래미장)에 다시 옮겨졌으며 192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개장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장(場)이 있었을 당시인 100여 년 전에도 사람들이 살았을 것 같으나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현존 성씨 중에서 밀양박씨 박우현(朴禹玄)이 50여 년 전에 해보면 중귀마을에서 옮겨와 수박동에 맨 먼저 터를 잡았다하며 장석골이라 부르는 곳에 인근 평촌마을에서 임장춘(林長春)의 둘째 아들 임석원(林碩源)이 결혼 후 분가하면서 1930년대말 경에 처음 터를 잡았다. 그 후 나주정씨와 평산신씨가 1940년 경에 진주정씨가 일제 말경에 들어왔으며 그리고 평촌교(1969년 완공) 건너 들판에 춘부동(春夫洞, 1789, 1912지명, 대야면)마을이 있었는데 수해로 인해 거주키 어려워지자 1963년 장석굴과 수박동 사이에 20여 호가 이주해 옴으로 해서 현재의 마을 규모를 이루게 됐다. 춘부동은 1971년 경지정리로 폐촌됐다.

월야리 금석(金石)

함평노씨 노신(魯愼)의 후손인 노연길(魯淵吉)이 1850년경 함평읍 진양리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옮겨와 터를 잡았으며, 예전에 조씨가 마을 뒤편에 터를 잡고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으나 자세한 입향 유래는 알 수 없다. 함평노씨 다음으로는 동래정씨가 1909년에 진주정씨가 1910년에 입촌했다. 어떤 지관이 이 마을에 금이 놀고 있다 해서 마을 이름을 "금석(金石,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했다. 짐석동(금석동의 사투리)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은 1985년 3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월야리 4구가 됐는데 이전에는 월야리 1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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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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