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리

영월리 덕령(德嶺)

정지아(鄭之雅)의 후손인 나주정씨 정이상(鄭以商)이 인근 양정리 양지마을에서 거주하다가 광산김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후 1500년대 초경에 이 마을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그리고 마을 북쪽 700m 쯤에 지아막골(기와막골)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덕령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성막동(成莫同)이 1958년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큰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대성동(大成洞)이라 하였으며 예전에 이곳에서 기와를 구웠다 하여 현재 3호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 뒤 덕령제(堤) 옆에 "알매(알뫼, 卵山, 1789년 호구총수 지명)"라 부르는 지명이 있는데 그 곳에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기 훨씬 이전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해오며 만석꾼, 천석꾼부자가 살았다 한다. 지금도 그곳에 옛 사기그릇 파편과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칠봉산(七峯山)의 한자락이 마을 뒷산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칠봉산 너머에 유덕군자(有德君者)가 날 터라 해서 큰덕(德)자와 재령(嶺)자를 써서 "덕령(德嶺)"이라 했었다는데 후에 원뜻과 다른 "덕령(德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으로 표기되었다.

영월리 석보(石堡)

마을이 형성되기는 400년쯤 된 것으로 전해오며 어느 성씨가 처음 터를 잡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 성씨 중에서는 나주정씨 정창후(鄭昌後)가 1600년대 말경 월야면 양정리 양지 마을에서 맨 처음 들어왔으며 이 마을에 살던 하동정씨 한 사람이 외곡(外穀) 5百여 석을 받고 살았다 한다. 이 마을은 칼같이 생겼다 하여 검뫼(劍山, 1789 호구총수 지명)라 부르던 마을이 먼저 생겼는데 뒤에 옥미리(玉米里 1912년 지명)라 고쳤고 월턱산 북쪽에 돌로 된 보가 있다하여 석보(돌보, 石堡)란 마을이 생겼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두 마을을 합쳐 석보(石堡)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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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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