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리

산남리 감남(甘南)

산남리 감남

본래 함평이씨의 터라고 전해오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나주 문평 남산에서 동암리 모라재에 입향했던 천안전씨 후손인 만상이 1700년경에 입촌하여 자작일촌을 이루었으며 그 집안에서 충, 효, 열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마을은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감남지리(甘南只里)로 표기되어 있다. 개감등 아랫마을로 감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감남기(감냉기 甘南)"라 부른다고 한다.

산남리 조내(鳥內)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형성된 듯하나 입증할 자료가 없고 본래 경주김씨의 터라고 전해오는 이 마을에 지금은 경주김씨, 천안전씨, 진주정씨 등이 살고 있다. 옛날에 감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져 울창한 숲을 이룬 곳에 새가 많이 넘나들어 뒷재를 조령(鳥嶺)이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마을 이름도 "새날재"라 부르고 "조내(鳥乃 새내골, 1914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표기)"라 했다. 지금은 조내(鳥內)로 쓰고 있다. 감남으로 이어지는 산등어리에서는 옛부터 상골과 감이 생산되어 그 산등어리를 "개감등(介甘嶝)"이라 부르며 바다가 퇴적되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와 지금의 노거수에 배를 매었고 감나무를 베어 이웃 불무골에 공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산남리 교감(敎甘)

산남리 교감

감남(甘南) 바로 옆에 위치한 마을로서 약 35년 전에 감남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설립과 발맞추어 마을 호수도 차츰 늘어나 마을 이름도 교감(敎甘)이라 불리게 되었다한다. 마늘 재배 등 특수작물을 많이 재배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산남리 교촌(敎村)

산남리 교촌

1933년 삼양사의 간척공사가 진행된 후 형성 되었던 마을로써 신도들이 많이 이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마을이름도 교촌(敎村)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산남리 대성(大成)

산남리 대성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어느 풍수객이 이곳을 지니다가 마을 앞에 멈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마을이 장차 크게 될 것이라 하여 마을명을 지어 주었다 전해온다. 마을 앞에는 넓은 간척지가 확 트여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글자 그대로 대성동이 되려는지 마을 옆에 1967년 손불남교가 설립되었고 그 후 2년 뒤인 1969년에는 정부양곡 보관창고와 공판장이 개설되어 마을이 점차 번창해 가고 있다.

산남리 용흥(龍興)

산남리 용흥

이 마을에는 정씨, 박씨, 이씨 등이 살았다 하나 밝힐 자료가 없고 1592년 임진왜란 때 강원도 횡성에 살던 의령 남응련(南 連)이 피난 정착하여 100여년 후 우여곡절 끝에 그 후손은 서편으로 옮겨 살고 대동 덕산에서 이주한 광산김씨 김세옥(金世沃)의 후손이 자작일촌이 되어 살고 있다. 지초가 돋아나는 어룡산(魚龍山) 고랑 밑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지곡(芝谷:지슬 지사리)"이라 부르다가(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는 산어(山魚)라 되어 있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용흥(用興)으로 표기했고 지금은 "용흥(龍興)"이라고 쓴다.

산남리 산직(山直)

산남리 산직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좋은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는 이곳 마을은 지곡 앞산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속칭 산정몰(山頂村)이 타당하나 산을 지킨다는 뜻에서 산직(山直)이라 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기사리 산직(其士里 山直)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남리 기서(己西)

산남리 기서

지곡 마을에 입향했던 의령남씨들이 자기들의 서편 마을이라 하여 "기서(己西)"라 이름 했다고 전하나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기사리 서변(其士里 西邊)으로 표기되어 있어 약칭으로 부를 때 其西가 된 듯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전에 己西로 바뀐 것 같아 의령남씨의 자작촌으로 한때 전염병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효열의 인물이 배출되었으나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의 선산인 연화도수(連花濤水)의 명당에 비석을 세운 뒤에 씨족이 화를 입어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산남리 수연(水蓮)

산남리 수연

1933년 간척지가 조성된 후 형성된 마을이며 연화도수의 명당자리가 있는 수연봉 밑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수연봉"이라 부른다. 연꽃의 영험인 듯 마을 샘물이 항상 넘쳐흐르고 수재들이 태어나고 있다.

산남리 가작(佳作)

산남리 가작

옛날 자작나무 고향인데 자작골이 가자골로 변형되어 "가작(佳作)"이라 표기 호칭하고 있다. 새날재와 함께 이웃 불무골에 숯을 공급한 듯하며 자작나무가 성장하던 터라서인지 마을이 위아래로 옮겨져야 성한다는 일화를 갖고 있다. 지금은 자작나무를 찾아볼 수 없고 뒷산에서 채취되는 하얀 고령토가 명물로 등장하여 전국 각처의 도자기 공장에 공급하고 있다.

산남리 내감(內甘)

산남리 내감

약 350년 전 임진왜란 후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함평이씨가 입주하여 이웃 감남으로 혼인하였다. 그 후 마을이 점차 번성하였으나 감남으로 이주하였다. 감남 마을에 살면서 이곳 마을을 잊을 수 없어 "안감남기(內甘)"라 불렀다고 한다.

산남리 강석(鋼石)

산남리 강석

강석은 해안을 다라 뻗어있는 산등어리에 점박이 몇 호가 산재하던 지대가 간척지 개발로 인해 이주민들의 집주로 형성된 마을이다. 간척공사 때 마을 앞 석산을 떨어냈다하여 속칭 "어장밑"이라 불렀는데 촌명 개정시 "강석(鋼石)"이라 호칭했다. 촌향의 건전(健全)을 기원하는 뜻에서 주민의 심건(心健)을 강(剛)으로 하고, 체건( 健)을 석(石)으로 하여 "강석(剛石)"이라 했다고 한다.

산남리 부풍(富豊)

산남리 부풍

마을의 위치가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북풍이 불어와 닿는 곳이라 하여 속칭 북풍받이라 부른다. 갈마음수(渴馬飮水)의 명당 터가 있다고 전해오는 이 마을에는 목마른 말에 물을 주려는 듯 마을 어느 곳이든 맑고 깨끗한 수맥이 흐르고 있어 "쌤꾸미" 또는 "갈마동"이라 부르기도 했으며(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渴馬洞으로 표기됨) 어원에서 오는 북풍이라는 차고 냉엄한 듯한 인상을 씻기 위해 부풍(富豊)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산남리 청동(靑銅)

산남리 청동

마을 윗고랑이 옛날에 쇠를 녹여서 무기와 도구를 만들던 불무(풀무) 고랑이었는데 불무에서 구리쇠가 있어야 흥한다는 뜻에서 "청동(靑銅)"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때 불무의 이름을 씻으려고 청사초롱을 뜻하는 청등(靑 )이라 개칭했다가 마을에 피해가 있기에 다시 "청동(靑銅)"으로 부르기로 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속칭은 청등머리다.

산남리 유록(柳綠)

산남리 유록

1933년 간척지가 조성된 후에 생긴 마을로써 속칭 모래촌 또는 모래철이라 부르는데 또한 사기촌, 갱변이라고도 불렀으며 마을 주변에 수양버들이 휘늘어져 있어 마을 이름을 유록(柳綠)이라 불렀다 한다. 현 마을 위치가 옛날 바닷가 상류라서 모래가 많이 밀려온 곳이며 월천 저수지로는 120만여 평의 간척답을 몽리할 수가 없어 1960년경 유록마을 상류에 저수지 산남제(山南堤)를 막아 이곳 농토를 몽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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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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