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산리

궁산리 신흥(新興)

궁산리 신흥

바우산 기슭에의 첫 입주자인 안성이씨 이광삼(李光三)과 함평노씨 노성복(魯成福)은 전북에서, 진주강씨 강대웅(姜大雄)은 해보면에서 입촌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지금은 강씨, 노씨, 박씨 등이 살고 있다. 신흥마을은 궁산리 1구인데 상신흥, 중신흥, 하신흥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며 1930년대 주포 간척공사가 준공되어 101정보의 농지가 조성됨으로써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흥(新興)"이라 부르게 되었다.

궁산리 덕산(德山)

궁산리 덕산

오백여년 전에 강씨 3호가 입주하였는데 얼마동안 살았는지는 모르며 강씨 이후 들어온 상산 김씨에 의하면 강씨가 덕산을 찾은 이유는 처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상산김씨에 이어 경주김씨 김재규(金載規)가 입촌했다. 마을 뒷산에 천재를 모시는 기재(祈峙)가 있고 산의 모양이 덕을 담고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덕산(德山)"이라고 했다 한다. 1789년의 호구 총수 지명에는 가덕산(加德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궁산리 목교(木橋)

궁산리 목교

마을의 형성은 이웃 덕산마을에 속해 있던 마을로 김해김씨가 살았다고 하나 밝힐 자료가 없고 경주김씨 김국진(金國振)이 1900년경 입촌한 이후 전주이씨, 광산김씨 등이 입촌하여 살고 있다. 주포 간척공사 이전 바닷가 상류 건널목에 나무다리가 있어 목교라 부른 것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주포 간척공사가 진행됨과 동시에 저수지를 막게 되고 삼거리와 손불간 도로가 개설되면서 돌다리(石橋)로 변하였고 현재의 교량은 1981년 도로포장과 함께 신축된 것이다. 일제 때에는 일본인이 살면서 흥업회사와 동양척식회사 창고를 지어 육로 수송의 거점이 되어 이웃 해창의 퇴락을 가져왔다.

궁산리 묘동(苗洞)

궁산리 묘동

전언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고려 이전에 여씨가 1백여 호 살았다 하나 지금은 1호도 살고 있지 않다. 조선 중엽인 300년 전에 광삼김씨가 들어와 살았고 바로 이어 경주김씨 3호가 입주하여 현재 그 가문이 자작일촌하고 있다. 옛날에는 사당이 있어 제사를 모시는 곳이어서 "묘동(廟洞)"이라 했으나 8 15 해방과 더불어 마을 주민의 결의에 따라 "묘동(苗洞)"으로 표기했다.

궁산리 신평(新平)

궁산리 신평

경주김씨 김정한(金正漢)이 이웃 묘동(苗洞)에서 1790년경 입촌한 후 연안차씨, 풍천임씨, 한양조씨 등 많은 성씨가 살고 있으나 단합이 잘된다고 소문이 났다. 옛날 계금산 비탈 궁들가에 있던 궁평 마을이 없어짐과 동시에 새 터를 잡아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평(新平)" 일명 새태(새터)라고 부른다. 마을서쪽 약 1km 지점 불무산 밑에 있는 금정동(金井洞 일명 불무초고랑)의 역사도 퍽이나 오래된 듯하나 고증할 자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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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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