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리

대전리 저전(楮田)(수문)

대전리 저전

이 마을에는 본래 함풍이씨가 살았다고 전해오나 밝힐 자료가 없고 1550년경 나주임씨 임열(林悅)이 아들 첩(堞)과 함께 입향하였고 1750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 김광재(金光載)가, 1790년경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중백(朴重伯)이, 1810년경 광산김씨(光山金氏) 김기채가 입촌하였다. 은곡(隱谷)과 저전(楮田) 마을로 분리되었으나 마을이 연결되어 있어 한마을이 되었으며 지금은 "수문"이라 부른다. "은곡(隱谷)"이 먼저 형성 되었는데 은선독서형국이라 하며 마을 동편에 닥나무밭이 있었기에 "동편" 또는 "저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옆 나주임씨 선산을 풍산등이라 하는데 쥐혈이라서 자손이 번창한다고 하며, 임씨와 김씨 두 집안에서 대대로 인물이 끊이지 않고 석학을 배출시켜 외지에서는 두 성씨가 용호상박하는 실태라고 전해오며 김씨들이 건금재 밑에 「건금동천」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대전리 대행(大行)

1700년 경 수문이에서 나주임씨 임명하(林明夏) 형제가 분가해 나와 살았고, 30년 후인 1730년경 남원양씨 양한량(梁漢良)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해오다가 1850년경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한다. 이 마을은 일명 "댕동(댕등)"이라 부르는데 등남산 중턱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문 표기 과정에서 원음에 가까운 "대행동(大行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전리 소재(所在)

대전리 소재

1933년 월천방조제가 완공되어 바닷가 상류가 완전히 육지로 된 지역이며 1920년 면사무소와 더불어 각 기관이 들어서고 상가가 형성되어 손불면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 시작하여 6 25후 5일시장이 개설되고 60년대 중학교가 설립된 후 번창하여 오고 있다. 이 마을이 면소재지라 하여 마을 이름도 "소재(所在)"라고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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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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