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리

양재리 장재(長才)

양재리 장재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옛날 이 마을에 장부자가 살았는데 솔대까지 세운 당당한 가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장자동"이라 했는데 후에 "장재동"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68년에 완공된 제방길이 201m의 호암제에서 많은 기와와 주추가 저수지 축조공사에 나와 전설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었다. 장씨 이후에 진주강씨(晋州康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며 약 250년 전에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월야면에서 이곳으로 이사해왔는데 현재도 전주이씨의 자작일촌(自作一村)이나 다름없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장재동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는 호암(湖岩)과 병합된 마을인 듯 하다. 또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호암의 지명이 없고 장재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호암이 장재동에 병합되었다고 본다.

양재리 호암(虎岩)

"장재"마을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장재마을과 함께 터를 같이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지형으로나 지리적 위치로 보아 풍수설에 깊은 관련이 있는 듯 하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산이 깊고 험하여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는 호랑이들이 앉아서 놀았다는 바위가 있는데 마을 이름도 이 바위 이름을 따서 호암(虎岩)이라 했다 하는데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는 호암(湖岩)으로 표기되어 있다. 1968년에 완공된 길이 210m의 호암제가 있다.

양재리 모량(慕良)

양재리 모량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에 행주기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3백여 년을 살았다고 전하며 함평모씨(咸平牟氏) 모 세빈이 아들 3형제와 함께 1680년 무렵 함평읍 대화에서 옮겨 살게 된 후 거의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장재동 "배들이들" 아랫마을로 1930년대 월천저수지가 생기기 전까지는 갯가의 마을로 "모린개"라 하였으나 모씨가 입촌한 후 한문으로 표기할 때에 어진 것을 숭상하자는 뜻에서 "모량(慕良)"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모량계(毛良界)로 표기 되어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 마을은 모란이 반쯤 핀 형국이라는데 모란 모양의 갯가라는 우리말 모란개가 엉뚱한 한자 지명으로 표기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왼쪽 정지등은 중의 목탁이고 오른쪽 모랭이는 목탁채며 이웃 마을 승선동은 중이고 완정재는 중의 연줄이라 한다.

양재리 신촌(新村)

6 25사변 이후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촌(新村)으로 부르고 있다. 모량마을과 같이 한 마을로 정착해 오다 6 25후 문화주택단지가 형성되어 신촌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이농현상이 두드러져 몇 호 남지 않고 도회지로 이거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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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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