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포리

초포리 초포(草浦)

조선조 중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万戶)벼슬을 하였던 이순화(李舜華)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마을이 형성된 지 약 500여년이 될 것으로 추정되며, 이 마을 앞에 있는 정자나무는 함평이씨(咸平李氏)가 이 마을에 기거하면서 심은 것이라 한다. 노령산맥을 따라 뻗어 내리다 우뚝 솟구친 천주봉의 정기가 서린 자그마한 수풀이 세로로 놓여 있으니 서편은 사산(射山)이요, 동편은 초포(草浦)이다. 북으로 불갑산이 솟아 있고 동으로는 오수산(五水山)이 마주 바라다보이고 있으며, 그 사이로 장성(長城)에서부터 툭 트인 길고도 좁다란 평야가 놓여있다. 예전에는 마을 뒷산과 마을 앞 정자나무 사이에 수각(修閣, 水閣, 1789년 호구총수지명, 서당과 같은 곳으로 글을 읽고 강의를 하던 곳)이 있어 인근 마을에서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한다. 또한 마을 옆 동산에서부터 마을 앞 방죽주위까지 수목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예전에는 이곳이 작은 포구(浦口)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초포(草浦)"라 했다고 한다.

초포리 사촌(沙村)

조선시대 때 백자(白磁)를 굽기 위해 이곳에 정착했다는 말만 전할 뿐 어떤 성씨인가는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변에는 도자기 조각과 가마, 취토장(取土場)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1850년대까지 자기를 굽다가 취토불능으로 인하여 지금은 자취만 있을 뿐이다. 도자기공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 버리고 현재는 초포에서 함평이씨(咸平李氏)가, 이문리에서 상산김씨(商山金氏)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987년 2월 22일 이 마을 주민들에 의해 발견된 돌널무덤(석관묘)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2,300여 년 전 청동기시대에 이미 이 인근에 부족국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주변에는 자기 조각과 가마굴, 취토장, 모래밭이 있어 사촌(砂村)이라고 하다가 후에 사촌(沙村)이라고 했다 한다.

초포리 환곡(環谷)

함평이씨(咸平李氏) 이택헌(李澤憲)이 초포(草浦)에서 살다가 위치가 좋아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 뒷산이 말의 형상으로 마굴안산인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말의 고리는 옥(玉)의 고리라 한다. 그러므로 고리의 형국이 보통의 고리와는 달리 임금을 모시는 특수한 고리의 형국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환곡(環谷)"이라고 하였다 한다.

초포리 사산(射山)

조선조 중종 때의 인물로 진사(進士)를 지낸 함평이씨(咸平李氏) 순지(舜枝)가 대략 500여 년 전에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이전까지는 사산(士山)이라고 표기했는데 근방에서 손꼽히는 좋은 터로 알려진 이 마을은 별로 높지도 않은 마을 뒷산이 활모양과 같다 하여 마을이름을 "사정뫼"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사산(射山)"이라 쓰고 있다.

초포리 입석(立石)

사산 마을에서 분가한 함평이씨가 먼저 이 마을을 형성했다는 말이 전할 뿐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고 1932년 식지면과 평능면이 합하여 나산면이 되기 이전에 이 마을에는 평능면사무소가 있었던 면소재지였다. 지금도 함평이씨가 대부분으로 마을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나산면에서 제일 높은 천주봉이 마을 뒤에 우뚝 솟아 있고 마을 앞에는 사산 마을이 있고 그 마을 뒤로 높지 않은 조그만 산이 있으며 마을은 사방이 광활한 들판이다. 선돌이 있어 마을 이름을 "입석(立石)"이라고 하였다 한다. 마을 입구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 5그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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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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