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리

용두리 용두(龍頭)

돌고개와 대안촌에서 살다가 이거한 기계유씨(杞溪兪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며 영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낸 유홍관(兪鴻觀)의 출생지라는 점으로 미루어 마을이 형성된 지 300여년이 넘을 것으로 보이며 현재 기계유씨가 주축을 이루며 살고 있다. 흔히 "용머리"라고 부르는데 갈동용머리와 식지용머리로 구분하여 두 마을을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지금의 열야면인 갈동면의 이곳 일부와 지금의 나산면인 식지면 이곳 일부가 합쳐 용두마을이 되었기 때문이다.

용두리 오수(五水)

이 마을의 형성에 대해서 뚜렷하게는 알 수 없으나 이문리 사정(沙亭)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어서 약 400여 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현재 상산김씨(商山金氏) 등이 살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당초 어수산(漁水山)은 오수산(鰲岫山)이 오수산(五水山)으로 바뀌고 지금 지도상에는 어수산(魚水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이름은 어옹산망(漁翁散網)과 모두 관련되어 있으며, 마을 이름은 당초에는 어수산의 명칭을 따서 "어수동(漁水洞)"이라 했다가 어수산이 오수산(五水山)으로 불려지게 되면서 오수동(五水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도 오수(五水)로 되어 있다.

용두리 선창(船艙)

한씨(韓氏)가 최초로 정착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현재 한씨는 한 가구도 살지 않으며 그 후에 입주한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옛날 나주(羅州), 함평(咸平), 광산(光山)으로 배가 다녔다고 하던 때에 이곳에서 배가 정박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선창(船艙)"이라 불렀다 전해오고 있다.

용두리 회화정(回化亭)

350여 년 전에 기계유씨(杞溪兪氏)가 대안촌(大安村)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기계유씨는 마을 뒷산에 선산만 있을 뿐 광주정씨(光州鄭氏)가 마을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형국이 게(蟹)의 모양을 하고 있어 구전에 의하면 마을 앞을 흐르는 식지천(食知川)에 살고 있던 고기가 마을의 냇물로 올라오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게의 발이 고기를 물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이 게의 형국이기 때문에 예전에는 마을 이름을 해(蟹)자를 써서 "해화정(蟹化亭)"이라고 했으나 쓰기 쉬운 글자로 바꿔 "회화정(回化亭)"이라 했다.

용두리 석현(石峴)

지금부터 약 400년 전에 광산탁씨(光山卓氏)가 터를 잡고 살면서 탁주부 탁정승이 살았다고 하는데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며 지금은 한 세대도 살지 않고 있다. 그 후 한씨(韓氏), 주씨(朱氏), 유씨(兪氏) 등이 정착했고 나산리에서 살던 광산정씨(光山鄭氏) 정선이 이곳으로 이거하여 정착한 후 현재 12대까지 살아오고 있다 한다. 이 마을에서 안잔골(월야면 내세마을)로 가는 고개에 돌무더기(성황당터)가 있고 회화정(回花亭)과 고라실로 넘은 길에도 돌무더기가 있어서 "석현(石峴)" 즉 돌고개라 불려지고 있다.

용두리 회룡동(回龍洞)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일등공신 부주공 박의현(朴義賢)이 순직하자 처인 함평이씨(咸平李氏)가 지금의 초포리 사산에서 친정살이를 하다가 아들 형제와 함께 이곳에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으므로 마을 형성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마을 뒷산인 석화산(石花山)을 등지고 선박(船泊)에 있는 수양제(水楊湜)에서 흘러나온 시냇물이 마을을 돌아 박정지(泊停地)에 이르는 형국이 용이 굽이치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회룡동(回龍洞)"이라 했다 한다.

용두리 선박(船泊)

1498년(연산군4년)에 김종직(金宗直)이 사화(士禍)로 화를 입자 그를 사사(師事)하던 선삼김씨(善山金氏) 석규(石圭)가 영남(嶺南)에서 난을 피해 이곳에 와서 정착하여 김씨촌을 이루고 있는데 이보다 먼저 광산이씨(光山李氏)가 살았다고 하니 5백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문이(船泊)는 배를 매었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옛날에는 고막천에서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으므로 "배문이"라 했다는 말도 있고, 마을 형국이 배를 맨 형국이어서 선박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는데 둘 다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고막원 돌다리 밑까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소금배가 들어왔고 짠물이 있었으며 고막천 유역의 지명중 소박등, 석지, 선창, 행주, 박정지 등 이를 뒷받침해 주는 말이 많이 있고 석화산을 옆에 끼고 대봉산을 앞에 안고 있는 풍광이 수려한 이 마을은 누가 보아도 배의 형국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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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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