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리

송암리 송암(松岩)

이 마을은 고창현감 등 여러 고을 수령을 지낸 영산신씨 신 함(辛??)이 나산리 동촌에서 살다가 고례동으로 이사하여 이곳 송암에 터를 닦았으니 마을이 형성된 지는 줄잡아 500여년이 넘는다. 이 마을의 신씨 가문에서는 부자가 진사를 한 신유장, 신지만 등의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이 마을은 신씨터라고 불리어온다. 마을 건너편에 거대한 바위가 있고 입구에 몇 아름 되는 소나무가 있어 송암이라 했다 한다.

송암리 죽리(竹里)

조선조 선조 31년에 해주최씨 최화(崔 )가 경기도 양주에서 임란을 피하여 전라도 무장(茂長)에 일시 머무르다가 다시 남하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한 지가 400여년 정도 되었다. 그 당시 촌후(村後)에 송죽림(松竹林)이 무성하게 자라 두루미(황새)가 철따라 서식하여 "송학(松鶴)"이라고 불리었는데 이 철새가 떠나자 온 마을에 오죽(烏竹)이 무성하여 한때는 "죽천동(竹天洞)"이라 불리어지기도 했으며 구한말과 한일합방 후에 "죽동(竹洞)" 또는 "죽리(竹里)"라 불리어진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죽마저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송암리 송계(松溪)

조선조 성종 때 어모장군(御侮將軍)과 호군(護軍)을 지낸 광산노씨(光山盧氏) 노상지(盧尙枝)가 광주에서 송암리 음지에 정착하였다가 송계로 이주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마을이 생긴 지 500년은 넘는다. 지금도 대다수가 노씨여서 송계를 노씨 터라 부른다. 노상지의 아들이며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남원부사를 역임했던 노극창의 호가 송계였던 까닭에 마을 이름을 "송계(松溪)"라 했다고 전하며 송계사(松溪祠)가 현존해 있다.

송암리 상촌(上村)

조선 성종 때 광산노씨가 송암리 송계마을에 정착하자 송계 마을과 인접한 지금의 상촌마을도 형성된 것이다. 송계마을보다 위쪽에 위치한 탓으로 상촌(上村)이라 부른다.

송암리 양지(陽地)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이 모두 이주하여 형성된 시기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 중 3대 이상이 살아온 사람은 없으니 음지의 터가 생긴 후라 추정되어 약 300여 년 전에 형성된 터로 본다. 산중이라 햇볕이 일찍 지는 것이 통례이나 이 마을은 볕이 오랫동안 지지 않아 마을 이름을 "양지(陽地)"라 했다고 한다.

송암리 음지(陰地)

조선조 성종 때 광산노씨(光山盧氏) 노상지(盧尙枝)가 광주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니 형성 시기는 500여년이 넘는다. 최초로 광산노씨가 살다 송계로 이주하였고 그 후 제주양씨(濟州梁氏)가 터를 잡았으나 모두 이주하였으며 지금은 각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오랫동안 많은 응달이 지는 마을이라서 마을 이름을 "음지(陰地)"라 했다고 전하며 현재도 오후 2시만 넘으면 해가 진다.

송암리 불매( 梅)

문성공 안유(安裕)의 후손인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전라북도 운봉에서 이 마을로 이주해 와 정착하였으며, 바로 그 후에 경기도 수원에서 해주최씨(海州崔氏)가 이주해 정착하였다고 전할 뿐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며 마을 당산나무는 순흥안씨가 입주할 당시 심었다고 전한다. 마을 뒤의 시묘산에 죽산안씨(竹山安氏)의 선산이 있는데 어느 날 중이 와서 풍수지리학상 이곳의 지형이 연화형(蓮花形)이며 바로 이곳이 불모명당이라고 했다 하는데 이에 따라 마을 이름을 "불매(彿梅)"라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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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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