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산리

나산리 대정(大正)

삼한시대에 개기(開基)된 옛터이며 누가 먼저 정착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거주한 것이 확실한 죽산안씨(竹山安氏) 이전에도 반남박씨(潘南朴氏), 영산신씨(靈山辛氏), 진주강씨(晋州姜氏), 연일정씨(延日鄭氏)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 안씨는 본래 광주에 살았는데 노극창(盧克昌)이 남원부사로 재임중 송암리 고향에 오는 길에 광주 극락강에서 백면서생(白面書生) 안충달(安忠達)을 만나 글재주를 시험해보니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여겨져 사위로 삼자 안충달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지금까지 이 마을은 죽산안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1908년경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한 나산병참소(羅山兵站所)가 이인정(里仁亭) 밑에 있었고 식지면(食知面)사무소와 나산보통학교 등이 이 마을에 있었으므로 면내에서 가장 먼저 개화(開化)한 마을이며 더욱이 일인(日人) 모리형재(森 長治, 森 友太)가 대지주(大地主)로서 수탈(收奪)을 감행하여 곡식을 보관하던 5천석 창고가 2개 있었다 하여 모든 것이 앞서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정(大正)"이라고 불리었다 한다. 그러나 옛 지명을 살펴보건대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이 마을에는 정양동(靜養洞) 대천동(大泉洞)이 있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靜養洞은 正良으로 바뀌고 大泉은 大川으로 바뀌어 있다. 대천의 大와 正良의 正을 따 대정(大正)으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나산리 동신(洞新)

이 마을은 삼한시대에 개기된 옛터인데 누가 먼저 장착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반남박씨(潘南朴氏), 영산신씨(靈山辛氏), 진주강씨(晋州姜氏), 연일정씨(延日鄭氏)가 먼저 입주하여 살았다고 전한다. 그 후 나산리 대정에 살던 안충달(安忠達)의 자손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세력이 확충됨에 따라 타성들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죽산안씨가 주종을 이루며 살고 있다. 대정 마을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촌(東村)이라고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신(東新)이라 표기하였다.

나산리 방하(芳荷)

이 마을을 처음 이룬 성씨는 진주강씨, 곽산정씨들이라고 하는데 개촌한 성씨들의 후손은 현재 한 집도 살고 있지 않다. 다만 이 마을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진주강씨 후손들이 무안군 해제면에 살고 있으며 선대(先代)의 묘가 이웃인 신평(新平)에 있다. 이어 입촌한 성씨가 죽산안씨다. 나산리 대정(大正)에 입촌한 충달(忠達)의 둘째 아들 사면(士??)이 1570년경에 분가하여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현재의 방하 마을은 방하와 옛 기용(騎龍 1789 지명)을 합한 마을이다. 뒷산은 옥녀봉, 앞산은 남산이라고 부르는데 이인정(里仁亭) 앞 방죽이 거울에 비유되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은 옥녀가 거울을 보며 거문고를 타는 형국에 비유 방하(芳荷)라고 했다한다. 그러나 입촌한 안씨들의 선조(先祖)의 고향이 광주 대촌동 송악의 방하(芳荷), 경기도 파주군 방하동(芳荷洞)인 점을 미루어 볼 때 선조들이 살았던 곳의 지명을 그대로 썼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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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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