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축리

삼축리 하장기(下場基)

마을이 언제 생성되고 어느 성씨가 먼저 정착했는지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숙종 때의 인물 함평이씨 이시정(李時廷)이 삼축리 태생이란 점을 미루어 보아 함평이씨가 가장 먼저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는 이 마을에 정착한 지 백년이 넘는 성씨는 없고 여러 성씨가 모여 산다. 1932년 식지면과 평릉면이 나산면으로 합쳐지자 교통과 지리적 여건이 좋은 이곳이 번창하면서 장터를 형성하게 되었고 현재 나산면의 행정 중심지이다. 1932년 식지, 평능이 합하기 이전에는 시장이 윗장터(上場基)에 있었으나 나산면으로 합치면서 아랫장터로 옮기게 되면서부터 "하장기(下場基)"라고 하였다.

삼축리 동축(東杻)

신평송씨 송긍(宋兢)이 신평 홍주에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피난처를 구하다가 이곳이 적당하다는 판단 하에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마을의 당산나무도 그때 심었다 한다. 이 마을 또한 상축, 하축과 함께 예전에는 "쌀울(杻)"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동쪽에 있는 쌀울 마을(東杻)이라 하였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도 동축(東杻)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오래전부터 불러온 이름이다.

삼축리 하축(下杻)

이 마을은 동축마을과 같은 시대에 신평송씨 송 긍(宋兢)이 임진왜란 때 정착하여 400여년이 된 터이다. 경주이씨는 덕림리 백양골, 죽산안씨(竹山安氏)는 나산리에서 이거하여 10여대씩 났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 비싸릿대가 무수히 자생한 곳으로 이 싸리나무를 베어 내고 마을 터를 잡았기에 "쌀울"이라 했다고 하며 하축, 상축, 동축은 지금도 쌀울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아랫쌀울"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는 마을이 "하축(下杻)"이다.

삼축리 상장기(上場基)

약 200여 년 전에 풍천임(豊川任)씨와 청주한(淸州韓)씨가 터를 잡았다 하나 구전일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1932년 이전에는 나산면의 시장이 이곳에 있었고 그 후에 함평이(咸平李)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으며 현재는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장터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상장기(上場基)"라 하며 예전에 장터가 이 마을에 있었던 까닭에 구장터라 부르기도 한다.

삼축리 백야(白也)

약 200여년전 농토를 찾아 각지에서 모인 농민들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6. 25동란 이전에는 28호가 마을을 이루었으나 뿔뿔이 흩어지고 2호만이 살고 있다.

삼축리 삼축(上杻)

사인정 후손으로 남원부사와 예조판서를 지낸 진주정씨 정이방(鄭以方)이 월야면 다래기에서 이주하여 21대손까지 존속하였으므로 이 마을이 형성된 시기와 정착 년대는 500여년이 넘는다. 지형의 소위 형국이어서 예전에는 싸리 축(杻)이 아닌 소 축(丑)을 써서 "三丑"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며 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비싸릿대가 무수히 자생한 곳으로 싸리나무를 베어내고 그곳에 마을 터를 잡았다는 설도 있다. 이 마을 동축, 하축, 상축을 합쳐 "쌀울"이라 하며 이 마을은 마을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윗쌀울(上杻)"이라 하였다.

삼축리 분토(粉土)

남평문씨 문명의(文命義)가 임진왜란 때 나산면 원선리 다랭이(石門안)에서 피난 왔다가 마을 산세가 거북이 몸같이 아담해서 이곳이 안주(安住)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여 정착하였으며 약 400여년이 된 터이다. 토색이 백색토질이라 "분토동(粉土洞)"이라 하였다고 하며 예전에 묘를 쓸 때 양회대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 분토(分土)란 지명은 대체로 고분이 많은 곳이다. 삼축리의 분토동 주위에도 평능, 사산의 백제 고분 분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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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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