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성리

석성리 신설포(新設浦)

일제 때 주포방조제가 건설되고 구주포가 포구의 구실을 못하게 되자 함평 유일의 해상 교통로로, 그리고 서해에서 잡은 어물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진 포구다. 원래는 "정포(鼎浦)"라고 했는데 구주포가 폐항되고 새로 설치한 포구라 하여 "신설포(新設浦)"라 불리었다. 1924년 간행된 함평군지에 신설포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불리운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근은 물론 원지(遠地)에 널리 알려진 이름은 "수랑개" "주포"다. 수랑개란 바다를 막은 간척지여서 진흙탕 즉 수렁탕인 갯가라는 뜻으로 불리운 이름이다. 수랑개는 수렁개의 사투리이며 주포라는 이름은 주막이 많은 포구라는 데서 붙여졌다. 함평만에서는 이곳에서만 잡히는 엽삭이란 특종고기가 있고 황실이(강달어), 준치가 잡히며 칠산바다에서는 조기가 많이 잡혔는데 이러한 어획물이 집산되는 곳이 주포였다. 따라서 어선이 대형화되기 이전인 1955년까지는 크게 번창하여 수많은 주막이 있었다. 그래서 신설포는 주포라는 별명으로 불리었고 그 별명은 이제 본 지명으로 바뀌었다. 1955년 이후 사양길에 접어들어 거의 폐항이 되다시피 하였는데 1982년부터 돌머리 해수욕장이 개장되자 각종 횟집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본래 포구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온 마을이기 때문에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모두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금녕김씨 사혁, 김해김씨 경룡을 손꼽을 수 있다.

석성리 덕흥(德興)

석성리 덕흥

이 마을은 지금부터 420여 년 전 해주최씨 형제가 개촌 했으며 후에 형은 이 마을에 정주했고 아우는 현 대덕리 고양촌으로 이거 하였다.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성씨들은 모두 100년이 넘는 성씨가 없다. 김해김씨는 정삼이 70년 전에 입촌했고 한양조씨는 응원이 60년 전에 신광에서 이주했으며 원주이씨는 70년 전에 신안군 도초면 하운에서 이거하였다. 원래 이 마을은 신흥(新興 1789 지명)이라 부른 것 같으며 현 김용식 소유의 집터에 성재사(成才寺, 200여년전까지 있었다고 전함)라는 절이 있어 마을 이름을 성재동이라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마을은 현재는 목장마을이 되었는데 1987년 목장을 일굴 때 백제토기 여러 점이 발굴되어 신고된 바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일대에도 백제 때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성리의 마을 중에서 개촌 연대가 가장 앞서는 마을이기도 하다.

석성리 석두(石頭)

석성리 석두

이 마을은 1789년 호구 총수의 지명에 돌두리(乭頭里)로 표기되어 있다. 또 1912년의 행정구역명에는 석두(石頭)로 바꿔져 있다. 함평에서 오래된 포구인 석두포(石頭浦)가 있던 마을이다. 그러나 서해가 융기됨으로 하여 모래가 밀려와 포구의 구실을 하지 못한 지가 이미 수십 년이 된다. 돌두(乭頭)는 돌머리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마을 서편 1km 지점에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어 돌머리라 하였다. 근년에 굴 양식장을 개장하면서 기암괴석을 폭파하여 운치를 잃고 말았으며 농바우 전설이 보는 이의 마음을 달랠 뿐이다. 또 이곳 돌머리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우단이 있었는데 해안초소가 들어서면서 자취가 없어졌다. 석두 입구에서 백제시대의 대형 옹관이 출토되었다. 이는 이곳에 어로와 농경생활을 하던 집단이 거주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석두 마을에는 1710년 경 김해김씨 대한(大漢 1687년생)이 손불면 학산리 지호에서 이주 정착하여 그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982년부터 돌머리 해수욕장이 개장됨으로 하여 교통편이 좋아지고 민박촌이 형성되는 등 마을 모습을 크게 변모시켰다.

석성리 성곡(成谷)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후인 1920년경에 성촌(成村)된 마을로 원래는 석두(石頭)에 속했었다. 마을을 이룰 때 수많은 백제 토기와 옹관묘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오랜 옛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에 틀림이 없으나 이에 대해 전해오는 말은 없다. 1920년경 김해김(金)씨 석운(碩云)이 백년동에서, 밀양박(朴)씨 길례가 성덕에서 광산김(金)씨 종숙이 해제에서 이주 정착하였다.

석성리 청학동(靑鶴洞)

석성리 청학동

이 마을은 일명 뙤밭등이라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활해왔으나 1955년 외국의 봉사단체인 케아의 구호 지원으로 6 25동란 때 난민 정착지로 선정되었다. 재산을 잃고 방황하는 난민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주택자재를 비롯하여 구호양곡을 지원받아 1차 20호, 2차 13호, 3차 10호를 건립, 신생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마을의 설립에는 설립자인 이재권의 숨은 공이 많았으며 이 마을 이름도 설립자의 꿈에 학이 이 마을에 앉아 푸른 서해 함평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상기해서 "푸른학"이라고 이름 지었던 것이다. 30여년이 지나는 동안 이곳에 정착했던 난민들은 연고지를 찾아 뿔뿔히 떠나고 현재는 난민 정착민은 불과 10여 호에 불과하다 이 마을 주민은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석성교 개교에 힘이 컸던 채희경 교사의 수산개발로 농외소득을 올려 지금은 기존 마을에 못지않은 소득마을로 탈바꿈하여 생활하고 있다. 채희경 교사는 수산개발의 유공자로서 1975년 12월 10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석성리 성덕(成德)

석성리 성덕

현재 마을이름을 "成德"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聖德"으로 표기되어 있다. 전언에 의하면 마을 앞에 임진란 때 토성(土城)을 쌓았기에 성안의 들을 성들이라 부른데서 성자가 연유되었기에 실은 재성자(城)를 써야 옳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을 개촌한 사람은 밀양박씨 신윤(新允 1705년생)으로 함평읍 기각리 구기산에 터를 잡았다가 1730년경 이주 정착했으며 신윤이 구기산에 터를 잡은 연유는 5대조가 함평현감을 지낸데 있다고 한다. 함평모씨는 150년 전에 이주 하였고 함평이씨는 대섭(大燮)이 70년 전에, 경주정씨는 용대가 60년 전에 이주했으며 김해김씨는 화숙(花淑)이 1965년에 입촌했으며 장흥임씨(任氏)는 1962년에 이주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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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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