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리

장교리 산음(山陰)

장교리 산음

풍수지리학상 현재의 산음은 가야금의 몸통이라 하여 금동골이었다. 이 금동골은 구전해오면서 금동굴, 금덩굴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후에 공식명을 산음(山陰)으로 표기했는데(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도 山陰으로 표기됨) 마을 바로 앞에 있는 산 그림자에 가려 해가 늦게 뜬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원래 이 마을은 경주이씨 대운(大運)이 1680년경에 개촌 했으나 풍수지리학상 이 마을이 경주이씨 터가 아니라하여 이웃 칠언으로 이거하였고 이어 함평이씨 유신(儒臣 1705~1752)이 1720년경에 이거 정착했으며 그 뒤를 이어 정성화(鄭成和)가 입촌 했는데 그 후손은 현재 한 집도 살지 않는다. 그 뒤를 이어 120년 전에 진주강씨 병운(炳運), 평산신씨 경국(敬國), 광산김씨 행서(行西)가 입촌 했고 90년전에 도광김씨 제옥(濟玉)이 들어와 살았다.

장교리 칠언(七彦)

장교리 칠언

현재의 칠언(七彦)은 원래는 가야금 일곱줄이란 뜻의 칠현(七絃)이었는데 후에 칠현(七賢 1789 호구총수 지명)으로 바뀌고 다시 "칠현(七玄)"으로 표기되다가(1914년 행정구역명) 근래에는 "칠언(七彦)"으로 쓰이고 있다. 칠언은 경주이씨의 자작일촌이나 다름이 없는데 경주이씨 중 이 마을에 처음 입촌 한 사람은 대운(大運)이며 입촌 연대는 1690년경이다. 현재 그 후손이 23호가 살고 있으며 다른 성씨는 6호가 있다.

장교리 월봉(月峰)

장교리 월봉

원래 기성면(箕城面)에 속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교리에 편입되었고 마을의 형국이 달의 형국이라서 "월봉(月峰)"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전의 장동(長洞)마을 까지를 합해 월봉이라 한다. 1789년 호구 총수의 지명에 월봉마을이 없는 것을 보면 그 이후에 형성된 마을임을 알 수 있는데 입향조의 내력에서 여실히 이를 증명한다. 이 마을의 개촌자는 전주리씨 량(樑 1798~1858)으로 1810년경 신광면에서 이거 정착하였으며 이어 경주이씨 집호(集鎬 1864년생?)가 1870년경에 칠언에서 이주 정착한 후 187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경주이씨 족보에 집호의 생년이 1864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20대에 문과 급제했다는 전언에 비추어볼 때 1854년(甲寅)생이 갑자(甲子 1864)생으로 잘못 오기된 듯 하다.

장교리 자명(自明)

장교리 자명

약 200년 전 신흥터에서 광산김씨가 살면서 마을 이름을 아들 자(子)와 울명(鳴)에서 따와 "자명(子鳴)"이라고 부르며 살다, 약 120년 전에 본 마을로 옮겨와 김해김씨, 광산김씨, 경주김씨 등 20여 세대가 살았다 한다. 마을 동쪽에는 장터골이 있는데 장터(닭우리)에서 닭이 자시에 울면 마을이 좋지 않다고 해서 스스로 자(自)와 밝을 명(明)을 써 "자명동(自明洞)"이라고 마을 이름을 고쳤다 한다. 현 무안군과 함평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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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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