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흥리

만흥리 국산(國山)

만흥리 국산

1910년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 영풍면의 면사무소가 이 마을에 있었다. 이 마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무안박씨가 들어와 정착을 했고 그 후 남평문씨가 들어와 살았는데 지금은 12호로 씨족중 제일 많은 호수이다. 현재 국산(國山)이란 마을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국당과 발산을 합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국당(국댕이)이란 마을 이름은 연국당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북벌계획을 추진하던 효종대왕이 붕어하자 이 마을출신 박천주(朴天柱)가 마을 뒤 구릉에 여막(慮幕)을 짓고 부모상을 당한 듯 애도의 예를 다하였다. 후일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숙종 때 연국당(戀國堂)이란 당호(堂 )를 내렸기에 마을이름을 국당이라 했다.

만흥리 만년(万年)

만흥리 만년

이 마을 이름은 마을 앞 저수지에 연꽃이 만발하게 피어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만련(万蓮)"이라 했다는데 후에(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도 万年洞이라 표기됨) "만년(万年)"이라고 고쳤다 한다.

만흥리 초동(草洞)

선조 때 막을 치고 생활하면서 마을이름을 "초막동"이라고 부르다가 초동(草洞)으로 명칭을 바꾸어 불렀다 하는데 자세한 내력은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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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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