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리

해보리 모산(茅山)

해보리 모산(茅山)

정유재란시 노경덕(盧憬德)이 의병을 모아 참전하면서 흥원(興遠), 명원(命遠), 치원(致遠)의 세 아들에게 피난을 떠나라 하니 흥원은 신광 구봉으로, 명원은 해보 모산으로, 치원은 신광 신려로 제각기 흩어졌다 한다. 한편 명원의 증조부가 동래부사였는데 그 당시 그가 말을 타고 다니다 말을 매어 두었었다는 회화나무가 새로이 번성하면 모산의 노씨들이 번성할 것이라고 노인들은 말하곤 한다. 노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마을 뒷산이 피리소리를 듣는 곳의 형국인데 이 산등에 띠가 덮여 있어 마을 이름을 "모산(茅山)"이라 했다하나 함평모씨와 관계되는 牟山이 본래표기가 아닌가 한다는 말도 있다. 지금도 마을 뒷산을 청덕머리라 하는데 청적뫼(聽笛山)가 아닌가 한다.

해보리 발미(發美)

해보리 발미(發美)

해보리라는 이름이 바다와 관련이 있고 이웃마을 지곡에서 선챙이(선창) 닻줄골 등 배, 바다와 관련된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먼 옛날에는 이 마을 앞까지 바다였고 이곳은 포구의 구실을 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현재 이 마을의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약 4백여 년 전이 되는데 정복일(鄭復一 임진 정유재린의 공신인 敏得의 아버지)이 처음 입주했다고 한다. 마을의 원래 이름은 "발저(簾底)"였다. "簾"이란 대오리나 갈대 등을 엮어 만든 것으로 햇빛을 가리거나 통풍을 잘되게 하기 위하여 거는 것이다. 처음 마을 이름을 발밑으로 한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해서이다. 이곳에는 옥녀가 거문고를 품고 있는 명당이 있다 하여 지명 중에 하염봉(下簾峰 옥녀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친 발), 비녀봉, 횡금등 등이 있다. 하염봉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발저"라 했는데 이 뜻과는 달리 미녀가 나올 마을이라는 뜻의 발미(發美 1789年 호구총수 지명)로 1912년경에는 맛이 나온다는 "發味"로 표기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다시 발미(發美)로 표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보리 월현(月峴)

맨 처음에는 범씨(范氏)가 살았다고 하며 그 유적으로 범가골이라는 지명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다. 그 후 조선조 초기에 최씨가 만호(万戶)의 벼슬을 하면서 외적을 물리치는데 공헌을 하여 임금님으로부터 지족실(知足洞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는 이름을 사혜(賜惠) 받아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며 그 흔적으로 철융바위가 있었는데 현재는 금산제에 매몰(埋沒)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임진정유란의 선무원종 2등공신인 정충량(鄭忠良), 정득량(鄭得良) 부자가 중흥하였으며 임진정유재란은 물론 병자호란 때 충의열사(鄭大鳴 호남창의대장)를 배출했다. 함평 수양산 기슭에 위치한 이 마을은 월양산과 부흥산이 좌청룡, 우백호의 형태로 되어 있고 금계천과 연동천이 서로 만나고 있어 웅장한 산세와 아름다운 수석이 조화되어 매화형국을 이루고 있다 하여 "감매(甘梅)"라 부르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 2등공신인 정출양의 아호를 따서 "지곡(芝谷)"이라 하며, 한편으로는 지족실의 이름을 따서 "지적실"이라고도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월현(月峴)"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보리 신촌(新村)

1950년 6 25 이듬해인 1951년에 산내리등 산중에서 살던 김제동 여러가구를 소개하여 집단 이주시킴으로 하여 생긴 마을이다. 전에는 이 마을 서편 산굽이를 돌아 영광으로 가는 길(밀재)가 있었으나 근래에는 금덕리에서 바로 밀재로 길이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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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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