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리

화양리 영화정(永化亭)

서기 1700여년 경 나주정씨 정광발이 처음으로 마을 터를 잡고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어 오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탐진최씨가 이주해 왔으며 현재는 12성씨가 살고 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영화정마을은 봄이 되면 온 산이 꽃으로 만발하여 꽃동산으로 되는 것에 연유하여 "영화정(永花亭)"으로 명명되어졌으나 영원히 변치 말자는 뜻으로 마을 이름에서 화(花)자를 화(化)자로 바꾸어 현재는 "영화정(永化亭)"으로 불려지고 있다. 영화정을 비롯 화양리의 각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는 목포부 신노면이었다.

화양리 농은동(農隱洞)

무안박씨 시조이신 박진승의 23세손인 박정호(朴挺豪)가 1758년 영조 때 무안군 면성면 매곡리 수반으로부터 정착하여 무안박씨 5호가 마을을 형성한 후 1871년 고종 때 전주정씨 정군칠(鄭君七)이가 이주하였고 점차 각 성씨가 모여 23호가 형성되었다가 1979년부터 도시 진출로 인하여 현재는 14호만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엄다평야의 크고 작은 넓은 들이 거침없이 펼쳐지는데 천자봉(天子峯)과 칠성봉(七星峯)이 병풍처럼 줄이어 조배(朝 )하고 마을 앞산은 말봉(馬峯), 옆산은 개봉(犬峯), 뒷산은 쇠봉(牛峯)이 있다. 이 삼봉(三峯)은 가축을 뜻하며 삼봉 중간에 샘을 팠는데 그 들샘수(野井水)는 세 짐승의 젖줄기라 하였으며 그 물이 어름 삼복더위에도 어름같이 차다 하여 한천샘(寒泉井)이라고 하고 마을 이름도 "한천동(寒泉洞)"이라 명하여 불러져 왔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농은동"으로 부르고 있다.

화양리 포향정(抱香亭)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에 무안박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무안박씨 일촌을 이루며 살았으나 그 후 여러 성씨가 입향하여 현재는 10개의 성씨가 살았고 한때는 호당 1명꼴의 공무원을 배출하여 공무원촌 으로도 이름난 마을이며 면장직에 재직한 사람을 2명이나 배출했다. 명산인 곤봉산맥이 뻗어 내린 줄기에 삼면으로 산이 둘러져 있으며 마을 앞에 노적봉으로 보이는 개봉이 위치하고 있다. 옛날 스님이 마을에 시주하러 왔다가 마을 형태를 두루 살펴보고 향기로운 보자기에 싼 형태라 하여 "포향정"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어주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불러오고 있다.

화양리 정양(正陽)

마을형성 시기와 지명유래에 대하여 전하여 오는 말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마을 앞에 함평들이 넓게 펼쳐 있어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함평읍 수호리 곤봉산 줄기를 따라 연화봉을 뒤로 하고 앞에는 수산봉이 위치하고 있어 아담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옛날부터 인심이 후하여 많은 각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음에도 6 25사변 때에는 한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화양리 쌍천( 川)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당시 함평천 제방이 없어 조금만 비가와도 농사는 물론 집을 지어 마을을 형성할 수 없는 곳이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나주에 계시던 밀양박시 30세손 박선규가 선견지명이 있어 이곳에 터를 잡으면 후대에 옥토가 이룩되어 풍요를 누릴 것을 예측하고 집터를 2m 가량 돋구어 정착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박병열의 집터에 400여년 된 팽나무 두 그루가 있어 정착년대를 입증하여 주고 있다. 마을 형성 당시 동쪽으로는 함평천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앞냇(前川)이라고 하는 중천(中川)이 흘렀다. 그 사이에 마을이 형성된 연유로 두 쌍( )자와 내 천(川)자를 합하여 마을이름을 "쌍천( 川)"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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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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