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야리

학야리 야리(野里)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충주지씨 26세손인 경생(敬生 1683년생)이 당시 황무지인 이곳에 터를 닦고 마을을 형성하여 충주지씨 일촌을 이루어 왔으나 그 후 타 성씨가 입향하였다. 마을 앞에 있는 300년 된 먹구슬나무(정자나무)가 이 마을의 긴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각고의 노력과 희생으로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어 들 가운데 마을을 형성하니 인근 마을 주민들이 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들말"이라고 부른 것을 야리(野里, 1789년 호구총수 지명)라고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개편 이전까지는 목포부 엄다산면이었다.

학야리 토교(土橋)

이 마을은 동국여지승람에 이제포(泥悌浦)로 적혀있는 마을로 고려조애 이미 개포(開浦)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그때 살았던 성시의 후손이 지금은 살지 않고 있어 알 길이 없다. 현재 살고 있는 성씨로는 충주지(池)씨가 먼저 입촌했는데 야리에서 250여 년 전에 분가 입촌했고 그 뒤 김해김씨 나주임씨가 들어왔는데 임씨들은 20여 년 전에 학교면 학교리로 이거 이 마을에 살지 않는다. 한일합방후 일인 고력(高力)이 이 마을에 정착 학야평야와 곡창동 학교면 전역에 농토를 넓혀 지주 노릇을 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마을은 함평천 하류에 자리잡은 마을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제포(泥悌浦)로 나와 있다. 또 지금은 학야교(鶴野橋)로 바뀐 다리는 이제포 곁에 있는 다리라하여 이제교(泥悌橋)라 했는데 후에 발간된 무안현읍지에 "학포(鶴浦)는 현의 동쪽 15리 토교(土橋)에 있고 토교는 돌로 놓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제포에서 학포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근세에는 학포가 토교포로 바뀌었으며 20여 년 전부터 배가 드나들 수 없는 곳이 되자 지금은 토교라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토교라는 지명이 학교(鶴橋)마을으로 되어 있는데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 옛 지명인 토교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포구일 때의 선착장은 현 감창기 소유의 집 뜰이었다.

학야리 대천동(大川洞)

충주지씨가 야리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터를 잡고 있을 무렵 남평문씨, 김해김씨가 이곳으로 이주해 와 마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농경지 정리 전에는 현재의 함평천이 두 갈래로 흐르다가 마을에서 합류되어 큰 천을 이루기에 큰내가 흐르는 마을이라 하여 "대천동(大川洞)"이라 하였다.

학야리 죽월촌(竹月村)

야리에서 충주지씨가 분가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이어 밀양박씨가 들어왔으며 평산신씨는 1900년대에 입촌했다. 야리와 인접해 있는 마을이다. 죽월촌이란 본래 죽촌과 월천(月泉, 1789년 지명)이 합해 생긴 촌명으로 죽촌은 대(竹)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고 월촌은 마을 옆으로 흐르는 냇이 반달모양으로 굽어 흐른다 하여 월촌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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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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