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교리

운교리 운림(雲林)

임진란 이전부터 도술에 밝은 운림처사라는 분이 살았다 하여 "운림촌(雲林村)"이라 불렀다 하며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씨족으로는 한양조씨가 맹생의 후손인 홍손(洪孫)이 큰 조카 세황(世황 1505년생)과 함께 판교에서 이주하였고 1750년경에는 함평노씨 급(汲)의 후손이 입촌했으며 김씨가 뒤를 이어 거주하게 되었다.

운교리 판교(板橋)

단종의 폐위에 항거한 한양조씨 맹생(孟生 문과급제)이 그의 아우 계생(季生)과 함께 1455년 경남으로 낙향했다가 부인 함평이씨의 본향인 함평에 인연을 맺어 손불면 북성리 군유산하 조피골에 은둔하다가 맹생은 판교(板橋)에 계생은 당시 대동면 매월촌(梅月村 현 대동 저수지에 수몰됨)에 정착했는데 계생의 후손은 뒤에 아차동으로 이거했고 맹생의 후손은 현재 판교촌의 주성을 이루고 있다. 맹생의 판교 입촌은 대약 1500년경으로 본다. 그 후 함평노씨 급(汲 1693년생)이 1720년경에 학교면 송산에서 이주했고 그 뒤 청송심씨가 입촌 하였다. 마을 앞에 천이 흐르는데 비가 많이 올 때 판자로 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다 하여 마을 이름을 "판교(板橋)"라 하였다 한다. 또 이 마을의 남쪽을 나마지, 북쪽을 북아시라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은 1912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구판교( 板橋)라 하여 신광면에 속했다가 다시 대동면에 편입되었다.

운교리 마량(馬洋)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마갈산리(馬渴山里)가 지금의 마양(馬洋)인데 그 후 1912년이나 1914년 지명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일단 이 마을이 폐촌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대동제 축제시 수몰지구인 갈구지 마을 주민 4세대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을 뒷산 형국이 목마른 말이 물을 찾아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형국이어서 마갈뫼(馬渴山)라 불렀으니 마갈로 하자고 하였으나 협의 끝에 마량(馬洋)으로 마을 이름을 붙였다. 마을 앞 하천가에 물레방아간이 생기면서 마을이 생동하였다고 하며 물방앗간 터는 말 구유터인데 물이 부어지므로 말이 물을 먹고 생동하여 마을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이 화목한 것은 말의 성질이 외면으로는 포악한 듯 하나 내면으로는 온유하여 사람을 등에 태워주는 동물인데 마을이 이런 말의 형국이라서 주민들이 화목하게 살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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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7-09-0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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