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리

백호리 석호(石湖)

지금으로부터 약 360여 년 전 황해도 풍천에 살던 풍천임씨 기(璂 1600~1659)가 비단장사차 이 마을에 들렀는데 당시 지관의 말이 거북이 명당이라 여기에 집을 짓고 살면 자손이 많겠다 하여 최씨와 함께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마을형국이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원래는 갈구지(渴龜池 1789년 호구총수지명에도 동일하게 표기됨)라 했는데 그 뒤 중사지(中沙池)로 부르다가 중사지와 석호(石湖 1912년 행정구역 개편 지명) 두 마을으로 나누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석호(石湖)로 통일했는데 석호라 부르게 된 연유를 아는 사람이 마을에 없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 유점(鍮店)은 마을 앞 잔등(백연동 앞)의 밭이다. 전설 : 마당실(馬堂室)이란 연못이 있었는데 중국의 목(睦) 정승이 피난길에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연못은 메워졌고 마당실이란 지명만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목 정승의 묘는 현 함평노씨 선산에 있다고 전한다.

백호리 용목동(龍沐洞)

옛날에 용이 목욕을 하고 가던 샘이 있는 터라 하여 100여 년 전에 全州李氏 이재문의 아버지가 터를 잡은 후 지금은 8세대가 모여 살고 있다. 용이 목욕을 하고 가던 자리에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용목동(龍沐洞)이라 하며 그 용샘은 지금 식수로 쓰고 있다.

백호리 백연동(白蓮洞)

본 마을은 조선조 중종시대 풍산홍씨가 정착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후 풍천임씨, 광산노씨, 광산김씨, 김해김씨, 장수황씨, 창녕조씨, 전주이씨, 진주정씨, 함평노씨, 평택임씨, 무안박씨, 기타 성씨 등이 살아왔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복판에는 마을이 생기면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1그루가 있는바 몸 둘레가 4m나 된다.

백호리 보화촌(保化村)

이천서씨 경인(景仁)이 1590년대에 무안 석진(石津)에서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는데 지금도 그 후손이 주축을 이루며 살고 있다. 해방 전 마을 앞산에서 금을 캤으며 논에서도 사금을 채취하였다. 이리하여 원래는 보화촌( 化村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부르다가 1912년 행정구역 개편 때 보화촌(保化村)으로 바뀌어 표기된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페이지 만족도 조사
최종수정일
2017-09-08 10:50
오류신고